[전문가 포럼] 이화동 벽화마을의 꽃계단이 사라진 까닭은?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걸을 때 우리는 다리의 보폭을 통해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단위로 세계를 경험하고, 그 느낌은 내디딤이라는 자극을 통해 뇌로 전달되고 의식 속으로 퍼진다. 그러므로 걷기 중에 마주친 예술작품은 수용의 차원에서 눈동자의 굴림만으로 이뤄지는 감상을 훌쩍 넘어서는 효과가 있다.

우리가 다니는 거리는 문이 없는 미술관이다. 청계천을 걷다보면 올덴버그의 ‘스프링’을 만나는가 하면, 광화문 거리에서는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수도 있다. 정신없이 지나쳐 버리지만 않는다면 예술작품과 마주칠 기회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생긴다. 미적 감수성이나 사회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그 마음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거리의 공공미술이 제작되는 주된 이유다. 무엇보다 사람과 작품이 서로 친근해져서 인간과 예술의 관계성을 탄탄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4월15일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에서는 공공미술로 그려진 그림이 그곳 거주자들에 의해 회색 페인트로 덮이는 일이 발생했다. 그림 훼손의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일단은 예술작품이 마을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 것에 기인했다. 이화동 벽화는 2006년에 착수한 ‘도시 속 예술(Art in City)’ 사업의 결과물이다. 도심 재생과 더불어 사회 취약계층에까지 문화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이중 취지에서 공공미술을 적극 활용한 기획이었다. 이 사업은 주민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낙후된 지역을 매력적인 관광지로 재탄생시켰다. 이로 인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홍보에 도움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벽화의 유지관리가 어려웠고 관광객으로 인한 소음과 쓰레기 때문에 거주자들은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산책이 거리의 존재 이유라면 휴식은 집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거리가 어두워지면 자기도 모르게 귀소본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데 그 목적지는 집이다. 집은 험난한 ‘바깥’과 대립되는 평화로운 ‘안’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가식을 벗고 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집이며 사생활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공간으로서의 집도 그저 개인이 머무는 장소만은 아니다. 집은 내가 힘들여 일한 대가로 획득한 점령지이고 끊임없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면서 바깥세상과 경쟁해야 하는 요새이며 어떤 때는 자신의 취향과 소장품을 과시하는 박물관이 되기도 한다. 집은 소유이고 의무이자 권리다. 집은 가족이 의식주라는 의식을 치르는 가정이라는 성역이기도 하다.

물론 17세기 초까지 개인의 일상은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이뤄졌다고 한다. 개인의 행동이 노출되지 않고 집이 사생활과 휴식의 기호가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과 노력을 더 쏟아야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사생활을 보호받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공공성의 개념을 확고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집 담벼락에 벽화가 그려지는 일은 사적인 영역이던 집이 공적인 영역으로 바뀌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모든 예술작품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의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관심 어린 눈길과 집중, 심지어 몰입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본래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새로운 주목을 받고 싶은 버려진 공장지역, 폐쇄된 탄광이나 노후된 철도역사, 손님의 관심이 필요한 관광지 기념품점들, 더러운 이미지를 벗고 싶은 쓰레기매립지 공원이 바로 공공미술이 필요한 장소다. 예술의 본성이 시선을 끄는 것임을 생각하면 도시 재생과 공공미술을 엮는 것은 완벽한 아이디어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주지의 경우라면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거리와 집은 각각 공적인 장소와 사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목적이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