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시내에서 고층 건물이 많이 있는 ‘시티 오브 런던’은 전통적인 금융회사들과 혁신적인 핀테크(금융+기술) 업체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런던 시내에서 고층 건물이 많이 있는 ‘시티 오브 런던’은 전통적인 금융회사들과 혁신적인 핀테크(금융+기술) 업체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영국 런던 한복판에는 또 다른 도시가 있다.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이라는 지역이다. 줄여서 대문자로 시작하는 ‘더 시티(the City)’라거나 그냥 ‘시티(City)’라고도 부른다.

면적은 2.9㎢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 2대 금융가다. 영국계 은행과 보험회사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가까운 지하철역 이름도 ‘은행(Bank)’이다. 시티는 우리식으로 치면 서울 중구 정도의 행정지역인데 대표를 선출할 때 거주자 외에도 이곳에 주소를 둔 금융회사들까지 투표권을 갖는다.

○금융위기 한파 극복 중

시티의 위세는 영국의 위세이기도 하다. 대영제국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월가가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지금도 영국의 금융산업은 세계 채권·파생상품·해외증권 등의 부문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외환이나 금속 거래 등의 부문에서 런던은 월가보다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더시티UK의 자료에 따르면 런던에서 금융 및 관련 산업 종사자 수는 69만2500명으로 전체 종사자의 14.6%를 차지한다. 부가가치 창출 규모는 745억파운드(약 129조원)로 런던 전체의 21.8%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은 시티에 시련의 시기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감원이 잇달았고 로이즈 등 일부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도 이뤄졌다.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영국 바클레이즈의 존 맥팔레인 회장은 지난해 투자은행(IB) 관련 인력을 25% 줄이겠다고 밝혔다. 실적 부진으로 쫓아낸 안토니 젠킨스 최고경영자(CEO) 자리에는 미국인인 JP모간 출신 제스 스테일리를 임명하기로 했다. 지난 2월 취임한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의 새 CEO 빌 윈터스는 최근 고위 경영진 1000명을 줄이겠다는 메모를 직원들에게 발송했다. 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는 IB 부문 인력을 80%나 자르고 소매금융 위주로 회사를 재편하고 있는 중이다.

영국 금융감독 당국이 또 다른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는 것도 시티가 풀어야 할 숙제다. 영국 건전성감독청(PRA)은 새 규제를 도입하면 대형 은행들의 부족자본 규모가 약 22억파운드(3조8200억원)~33억파운드(5조73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핀테크 선도 중심지로 부활

그러나 ‘금융 종가’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시티는 기술 기반 금융으로 새롭게 부활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영국 정부는 2010년 시티 지역에 ‘테크 시티’를 조성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바클레이즈, 씨티그룹, 크레디트스위스 등이 참여해서 핀테크(금융+기술) 회사들을 지원하는 ‘핀테크 이노베이션 랩’ 등을 만들었다. 신생 업체를 돕기 위한 ‘스타트업 부트캠프 핀테크’도 열었다.

그 성과가 이제 나타나고 있다. 시티는 지금 ‘런던의 실리콘밸리’로 변모하는 중이다. 컨설팅회사 액센츄어 자료에 따르면 핀테크 관련 투자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곳은 유럽(14억8000만달러)이다. 전년의 두 배 이상이다. 유럽에서도 런던이 가장 많은 몫(5억3000만달러)을 차지했다. 규모 면에서는 아직 실리콘밸리를 거느린 미국(20억달러)에 못 미치지만, 성장세가 무섭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채권 트레이더였다가 핀테크 업체를 시작하려 하는 라자 팔라니아판은 최근 인베스터지와의 인터뷰에서 “런던의 (정보기술업체들이 많은) 올드스트리트와 (금융기업이 많은) 리버풀스트리트는 매우 가깝다”며 “이것이 핀테크 영역에서 영국의 경쟁력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기술 영역에서 쌓인 노하우와 정보가 자연스럽게 인적 네트워크를 따라 유통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뜻이다.

○위안화 국제허브로도 발돋움

시티는 최근 세계 3위 거래 화폐로 떠오른 위안화의 국제 허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20일 런던에서 약 50억위안(8900억원) 규모의 1년 만기 국채를 3.1% 금리로 발행했다. 중국 정부가 국외에서 위안화 표시 국채를 찍은 것은 처음이다.

당초 계획했던 물량의 여섯 배인 300억위안의 수요가 몰려들었다. HSBC 국제외화채권 책임자인 크리스 존슨은 “최근 중국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었고, 역외 발행된 중국 채권 물량이 적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좋은 발행 실적”이라고 평가했다. 갈수록 강화되는 영국과 중국 간 밀월관계는 시티에 새로운 수익모델을 제공할 전망이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