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해양플랜트, 제2 조선신화 쓸 수 있다
세계 7대 교역국이며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한국은 수출의존형 경제구조로 인해 늘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긴장 속에 있다. 조선·해양플랜트산업은 자동차, 반도체 등과 함께 세계 1위를 다투는 한국의 대표산업 중 하나다.

조선·해양플랜트산업은 수출액의 거의 전부가 무역수지 흑자로 기록된다. 조선소들이 엔지니어링 기술자립과 기자재 국산화를 통해 일군 성과다. 조선산업은 장기 에너지수급 구조상 앞으로 30년간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해양플랜트부문을 성장동력으로 삼아 불황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해양플랜트는 단위 프로젝트 매출규모가 조선의 수십 배에 달해 수출효과는 큰 반면 ‘EPCI(설계·조달·시공·설치·시운전) 가치사슬’로 구성되기 때문에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납기와 기자재 결정권을 행사하는 엔지니어링 기술자립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산업이기도 하다.

최근 해양플랜트 프로젝트에서 발생한 대규모 손실은 셰일가스의 부상, 유가 하락 등 시장불황에도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양플랜트 엔지니어링의 역량부족과 기자재 의존에 따른 납기지연 탓이 크다. 세계 최고 수준의 건조기술을 갖고 있는 한국은 해양플랜트 선진국의 엔지니어링 기술장벽과 법적 규제에 가로막혀 있고, 기자재 발주분야에서는 실적 장벽과 개발도상국 발주국가의 현지화 요구 등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게 사실이다. 한국 조선소가 그동안의 해양플랜트 건조실적을 발판으로 발주사인 오일메이저로부터 EPCI 주계약자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 지금이 엔지니어링 기술자립의 적기라고 할 수 있다.

해양플랜트산업은 반도체·휴대폰산업 등과는 달리 기술개발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고 특허나 표준화의 성과도 단기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동안 정부의 연구개발(R&D)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린 까닭이다. 그러나 같은 현상도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엔지니어링 분야의 기술개발 주기가 길다는 것은 기술을 확보하기만 하면 장기간 전략산업화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또 한 명의 천재가 나타난다고 해서 석권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식과 경험 수준이 높은 집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국에 적합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해양플랜트는 30년 이상 경험한 인력과 세계 최고의 ‘빅3’ 조선소를 보유한 한국이 오랫동안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분야란 설명이다.

다만 엔지니어링 기술자립은 한국이 주체적으로 수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엔지니어링 기술의 요체는 문제를 단순화할 수 있는 힘이며, 해양플랜트 기자재는 디테일과 노하우가 필요한 분야이므로 두 분야 기술은 우리 스스로 발주자가 돼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한 쉽게 습득할 수 없다.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유전개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선령(船齡) 31년을 넘긴 두성호가 한국의 유일한 시추선이다. 글로벌 시추선 건조시장 점유율 1위인 한국은 이제 한국형 해양시추선 개발사업을 통해 자원개발능력 확대와 해양플랜트 엔지니어링 및 기자재 실적 확보라는 일석이조의 성공스토리를 써야 할 때다. 정부가 오일메이저의 입장에서 프로젝트를 발주하고, 산·학·연이 EPCI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행한다면 과거 조선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다 준 제2의 LNG(액화천연가스)선 신화를 쓸 수 있다.

엔지니어링산업은 EPCI를 아우르는 능력이 필요한 분야이며 산·학·연 팀워크와 리더십이 요구되는 분야다. 한국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출연연구기관이 엔지니어링기술의 새 지평을 여는 과업에 동참해 협력의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한다.

홍사영 < 한국해양공학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