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前부총리가 지적한 한일경제의 차이…"한국경제 이중불황,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경제학계의 거목 조순 전 경제부총리(사진)가 진단한 한국 경제의 근본적 문제점은 ‘쏠림 현상’이었다. 그간 우리 경제의 공식이었던 수출·성장·대기업 위주 성장이 한계에 봉착해 체질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조 전 부총리는 지난 23일 중앙대 행정대학원이 주관한 ‘자본주의 경제의 전개 과정과 한국 경제의 방향’ 제하 특강에서 “한국 경제가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현재 한국 경제의 위기를 대외 요인과 대내 요인으로 나눠 설명했다. 외부에서 수입된 대불황과 국내 요인으로 인한 소불황의 ‘이중불황’으로 규정했다.

대외 요인인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우리나라의 능동적 해결책은 거의 없다고 전제한 노(老)학자는 대내 요인에 대해선 “개발연대 이후 수출·성장 지상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중소기업과 내수산업 성장이 낙후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수출과 성장을 최우선에 둔 경제정책이 대기업 위주로 흘렀고, 경제 기초체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현재의 소불황을 극복할 힘이 떨어졌다는 것.

특히 조 전 부총리는 일본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한국 경제는 더 심한 디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잃어버린 20년’을 보낸 일본은 중소기업이 건실하게 받쳐주고 기술 수준이 높아 디플레를 헤쳐 나올 힘이 있었지만 우리 경제는 이런 기초체력이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수출과 성장, 대기업 위주의 편중된 경제성장에 전력투구하면서 정치 사회 문화 복지 교육 등 제반 분야에서 건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한 점도 문제로 꼽았다. 역대 정부가 경제 이외의 요소를 소홀히 해 경제 외적 기반이 취약해진 것이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부메랑이 됐다는 얘기다.

조 전 부총리는 경제학의 원천을 ‘정치경제학’으로 규정하며 경제 외적 요소들과의 관련성(relevance)을 강조해 왔다. 경제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정치적 요인들을 도외시한 채 경제 자체에만 지나치게 포커스를 맞춘 데다 경제정책 내부에서도 쏠림 현상이 지속돼 허약 체질이 됐고, 결국 불황을 극복할 체력마저 떨어졌다는 문제 제기인 셈이다.

‘경제학원론’ 저자이기도 한 그는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전 한은 총재,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이 조 전 부총리의 제자다.

☞ 다음은 조순 전 부총리의 특강 전문.

이 강의의 목적은 자본주의의 미래를 알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선 자본주의의 과거를 살펴보고, 현재의 문제를 논한다. 한국경제의 방향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관견(管見)을 제시한다.

Ⅰ. 자본주의의 생성(生成): 영국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만남

(1) 자본주의는 하나의 문명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특성은 사유재산의 보호, 계약의 자유, 자유경쟁의 보증 등에 있다.

(2) 자본주의는 16세기 영국에 의해 생성되었다. ‘인클로저(Enclosure)’에 의한 농업혁명이 자본주의의 효시(曉天)였다. 유럽 대륙에도 인클로저가 있었다. 그것은 왕(王)의 윤허(允許) 하(下)에 이루어졌다. 영국에서는 지방 토호(土鎬)에 의해 ‘자유로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은 원래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민중도 강하지 않았다. 부호는 강했다. 왕의 마음대로 세금을 거둘 수 없었고, 부호가 지배하는 의회(議會)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1649년 찰스(Charles) Ⅰ세가 처형(處刑)된 것은 후세 유럽의 모든 혁명의 효시였다. 1688년 제임스(James) Ⅱ세가 추방되어 의회에 의해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으로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확립된 것도 역사상 처음이었다. 영국은 부르주아 독재제(獨裁制)에 가까웠다. 인클로저는 순탄치 않은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거쳐, 거의 19세기까지 계속됐다. 그것이 완성됐을 때에는 영국농업은 완전히 근대화돼 있었고, 소득, 재산, 교육, 의식면에서 도시와 농촌사이의 격차는 없어져 있었다.

(3) 자본주의가 오직 영국에서 생성 발전한 원천(源泉)은 또 무엇인가. 영국인 특유의 가치관(價値觀)인 자유주의(自由主義) 개인주의(個人主義)에 있었다. 그 원천(源泉)은 또 무엇인가. 그 근본적인 원천은 영국인 특유의 가족(家族), 가정생활(家庭生活)의 오랜 관습 내지 제도에 있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人類學者) 엠마뉴엘 토드(Emmanuel Todd)의 유럽 각국(各國), 각 지역의 농촌 가족 가정생활의 관한 연구에서 말한 「절대적 핵가족 제도(絶對的 核家族 制度)」 에 자유주의의 원천이 있었다. 이 가족 제도는 한마디로 각 개인은 성장하면 부모를 떠나야 하며, 완전히 자유로이 자기의 삶을 꾸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국인의 독립심, 모험심, 탐험심, 근면성, 연구심, 그리고 무자비(無慈悲)한 소유욕(所有慾), 쟁탈성향(爭奪性向) 등을 심어주었다.

(4) 이 성향(性向)을 강하게 가진 청교도(淸敎徒)의 수장 크롬웰(Cromwell)은 시민혁명(市民革命)이 끝난 직후, 1649년 청교도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침공했다. 청교도혁명에 반대한 아일랜드 구교도를 응징하는 동시에, 자방의 토지를 ‘인클로즈(enclose)’하여, 아일랜드의 식민지화(植民地化)가 시작됐다. 자본주의가 곧 제국주의의 탈을 쓰게 됐다. 아일랜드는 그 토지의 80%를 영국 현지지주(現地地主) 또는 부재지주(不在地主)에 빼앗기고, 움막 속에서 감자만 먹고 연명했다. 그런데도 수백년 동안 처절한 저항을 계속하여, 끝내 독립을 쟁취했다.

영국의 식민정책을 옹호한 유명한 학자 두 사람이 있다. 윌리엄 페티 경(Sir William Petty, 1623-1687)와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이다. 페티의 이론은 한마디로 토지나 자연은 신이 인간에 하사한 선물이며, 토지는 그 가치를 높이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클로저와 식민정책의 이론을 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담 스미스보다 100여년 전에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창도했다. 로크도 비슷한 이론을 주장하면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했다.

(5) 영국은 1600년 영국증권거래소(英國證券去來所)를 설립하여, 자본주의 발전의 자금조달 채널을 마련했다. 또 같은 해에 동인지개발(同人地開發)의 상징이다. 역사학자 더크스(Nicholas B, Dirks) 교수(컬럼비아대)가 그의 저서 『제국의 추행(醜行)』(The Scandal of Empire, Harvard, 2006)에서 말한 대로, ‘제국과 자본주의는 손에 손을 맞잡고 탄생하여, 같이 현대 영국을 만들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영국 자본주의가 국내(國內)에서 한 일을 국제무대(國際舞臺)에서 재연(再演)한다면, 그것이 곧 영국 제국주의가 될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다. 지금은 제국주의를 해서 성공할 나라는 없다. 또 자유주의(自由主義) 개인주의(個人主義)로 자본주의를 이끌 수도 없다.

(6) 영국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제국(大帝國)을 만들고, 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은 무엇을 얻었는가, 더크스 교수는 영국은 인도(印度)로부터 매년 GDP(국내총생산)의 6% 정도의 순소득을 얻었다고 썼다. 전 세계 식민지로부터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영국이 얻은 눈에 띄지 않는 엄청난 이득을 식민지로부터 얻었다는 것을 간과(看過)할 수는 없다. 그 많은 식민지는 종주국(宗主國) 영국의, 인재 양성소(人材 養成所)였다는 점이다. 식민지는 영국 군인에게는 연병장(練兵場), 욱해전 작전(陸海戰 作戰)의 수색장(修塞場)이 됬고, 외교군(外交君)에게는 이문화 국민(異文化 國民)과의 외교교섭(外交交涉)의 실습실(實習室)이 되었고, 경제학자(經濟學者)에게는 자본이동(資本移動)과 마케팅의 시험장이었고, 역사가(歷史家)에게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교습장(敎習場)이 됐다. 특히 18세기 영국은 기라성 같은 많은 인재들이 배출(輩出)됐는데, 그 중 최고급 인사들이 인도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이 깊었다.

(7) 일국의 경제가 순조롭게 발전하자면 <경제(經濟)의 기반(基盤)>과 <경제외적 기반(經濟外的 基盤)>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전자(前者), <경제(經濟)의 기반(基盤)>은 생산요소(生産要素)의 양(量)과 질(質), 과학기술(科學技術)의 수준, 부(富)와 소득의 분배의 형평(衡平) 등을 말한다. 후자, <경제외적 기반(經濟外的 基盤)>은 가정, 학교, 사회의 교육(敎育), 정부의 청렴성(淸廉性)과 능력(能力), 경쟁(競爭)과 협력(協力)의 조화 전통(調和 傳統)과 관습의 질(質) 등을 말한다. 영국은 원래, 자본주의 초기에는 이 두 가지 기반이 그리 좋지 못했으나, 국민의 예지(叡智)와 인내(忍耐), 연구심(硏究心), 독립심(獨立心), 용기(勇氣), 모험심(冒險心) 등으로 두 가지 기반을 훌륭하게 닦음으로써, 세계에 관절(冠絶)한 덮는 대(大)제국을 만들었다.

II. 영미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두 번째 만남

1. 영국의 신우파(新右派)

영국은 2차대전 이후로 식민지를 다 잃고, 다른 서구제국과 같이, 경제의 기반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불평등과 빈곤이 증가하여,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북해에 뜬 소국(小國)이 그만큼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한 구도(構圖)가 지금까지 계속 그 위치를 지키기는 어려웠다. 국력의 쇠퇴(衰退)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공동체의 의식도 없어졌고, 재정이 빈약하여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다. 대처 여사(女史)의 집권 초기에는 아르헨티나 근해의 영국령(英國領) 포클랜드(Falkland) 섬을 무단 점령당하는 수모를 받기도 했다.

영국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1979년 집권을 시작한 보수당 마거릿 대처(Margret Thatcher) 수상은 다시 영국 자본주의를 부활(復活)시키기 위해서는 획기적으로 강력한 자유주의 사상을 정책기조로 삼을 것을 결심하고, 당시 뉴라이트(New Right)로 알려진 정책기조를 채택했다. 노조의 제압, 국·공유 재산의 민영화, 정부에 의한 완전고용 정책의 포기, 노동시장의 완전자유화 등, 미국의 시카고 학파의 정책을 채택했다.

대처는 이런 정책을 펴면서도 집권 초기에 이데올로기보다 민심의 동향을 중요시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차 미국의 과감한 절책에 경도(傾倒)되어, 끝내는 유럽과 대립각(對立角)을 세우다가, 사직했다. 대처 정책은 성공했는가. 그의 인기는 좋았으나, 별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국민의 세금부담은 오히려 더 많아지고, 정부도 오히려 커졌다.

2. 미국의 레이건과 클린턴

미국 경제도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플레의 만연, 국제 경쟁력의 저하, 경제 불균형의 심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73년 변동환율제도(變動換率制度)를 채택하여 경상수지의 적자를 막고자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유럽과 일본의 부활, 아시아 4용(龍)의 대두 등, 세계는 점차 미국이 주도한 전후체제(戰後體制)를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추세를 막고자 자유주의 만능의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를 들고 나온 레이건 대통령은 노조의 제압, 감세, 자유화, 민영화, 작은 정부 등의 정책기조를 폈다. 그는 무엇보다도 악(惡)의 제국(帝國) 소련을 제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고, 전략적 국방구상(戰略的 國防構想·SDI)을 들고 나오면서 소련에 대해 일명(一名) ‘별의 전쟁(Star War)’의 도전장(挑戰狀)을 내밀었으나, 소련이 붕괴함으로써 ‘별의 전쟁’의 활극(活劇)은 없었다. 레이건의 인기는 절정에 달하고 미국은 냉전승리에 도취되어 한동안 들떠 있었다.

레이건-부시의 뒤를 이은 빌 클린턴은 레이건 정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대대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때마침 일어나는 IT(정보통신) 산업의 발전에 편승하여 많은 벤처기업이 생겨났다. 미국에는 이제는 과거와 다른 신경제(新經濟)시대가 왔다. 앞으로는 영원히 불황없는 번영이 이어진다는 환상이 전국 전세계를 휩쓸었다.

클린턴은 90년대 후반, 또 하나의 환상(幻想)의 씨를 뿌렸다.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식 전구적기준(全球的基準):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인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작은 정부를 세계적인 경제운영의 강반(綱頒)으로 삼아서 전세계 경제를 낙원(樂園)으로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이런 구상은 사실 계몽시대(啓蒙時代, Enlightenment) 때부터 서구에서 내려오는 사상이었다. 서구의 문명을 전세계에 펼치면서 세계의 모든 문명을 흡수통합(吸收統合)하여 하나의 보편적문명(普遍的文明, Universal Civilization)을 이루자는 이상이었다.

레이건 이래의 정책, 신자유주의, 신경제, 글로벌라이제이션, 보편적문명 등은 모두 일종의 유토피아(Utopia) 같은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미국의 자유주의 만능정책(自由主義 萬能政策)은 경제의 금융화(金融化)를 가지고와서 금융위기(金融危機)를 불러왔다. 금융위기는 일단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여진(餘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신경제(新經濟)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온데 간데 없이 없어지고, 남은 것은 아시아 중시정책(Pivot to Asia), TPP(범태평양협력체, 汎太平洋協力體) 등, 글로벌라이제이션과는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정책들이다.

III. 21세기 신상태(新常態, New Normal) 이후의 자본주의의 방향

(1) 자본주의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종래 영미의 패권 하의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자유주의 내지 자유방임(自由坊任)이었다. 영미의 패권 이후의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공공 이익을 책임지는 정부와 민간의 자유활동(自由活動)을 보호하고 조절하는 자유시장이 공존하는 패러다임이다.

(2) 자유시장(自由市場)은 장점도 많으나, 단점도 적지 않다. 장점으로는 개인의 경제활동은 합리적이며, 역동적인 면을 들 수 있다. 슘페터가 말한 대로 자유방임경제(自由放任經濟)에는 창조적 파괴(創造的 破壞)의 끊임없는 강풍(强風)이 불어서 빠르고 강력한 경제발전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러나 반면, 자유만능(自由萬能)의 경제에서는 자동조정능력(自動調整能力)이 부족하여, 그 강풍(强風)은 순풍(順風)이 아니라 역풍(逆風)일 수가 있어서 자기혁신(自己革新)이 아니라 자기파괴(自己破壞)를 가지고 오는 수도 많다는 데 있다. 이것을 ‘시장의 실패’라 부른다. 예를 들면, 90년대의 미국의 금융 자유화는 ‘경제의 금융화(金融化)’를 통하여 금융위기(金融危機)를 가지고 왔고, 그것은 유럽에는 재정위기(財政危機)를, 또 세계경제에는 New Normal(신상태·新常態)의 상징(象徵)인 저성장(低成長) 내지 장기침체(長期沈滯)를 몰고 왔다. 정부는 공공이익(公共利益)의 수호자(守護者)로서 자유시장의 장점을 보호하고 단점을 제거하는 책임을 진다.

(3) ‘시장실패’가 있다면 ‘정부의 실패’는 없는가. 많다. 시장의 실패 못지않게 많다. 정부의 실패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국정의 책임자가 국가의 앞날에 대한 확실하고 바른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전이 있어야 국정의 방향이 있다. 지도자의 비전은 틀림없이 국민에게 전달된다. 국민이 그 비전에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지도자는 비전을 조절할 수 있다. 그것도 국민에게 전달된다.

비전 있는 지도자는 강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정부를 통해서 비전을 실현(實現)할 전략과 전술을 짤 수 있다. 강하다는 것은 청렴하여, 부자나 권력자의 유혹(誘惑)이나 협박(脅迫)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성(道德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유능하다는 것은 국내외 정세와 국가의 사정을 잘 알아서,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할 지혜(知慧)와 지식(知識) 및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용장(勇將) 밑에는 약졸이 없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용장(庸將) 밑에는 강졸이 없을 것이다.

(4) 나라가 잘되고 못되고는 정부가 좋으냐 나쁘냐에 달려있다. 민주주의라 해서 정부가 좋지 않아도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국민에게 항상 정부를 믿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마치 기업의 회장이 고객들에게 우리사회의 이사들을 믿지 말라는 소리와 같다. 이런 회사가 잘 될 수는 없다. 지금 세계에는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좋은 정부를 가진 나라가 많지 않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급한 것은 좋은 비전 있는 지도자와 지덕(知德)을 겸비한 정부를 가지는 일이다.

(5) 신상태 하(新常態 下)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경제(經濟)의 기반(基盤)>과 <경제외적 기반(經濟外的 基盤)>을 갖추는 일이다.

IV. 한국경제(韓國經濟)의 방향(方向)

1. 한국경제 위기의 본질

(1) 한국경제는 지금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의 진로가 막혀있는 상태에 있다. 그 위기에는 두 가지 불황(不況)이 복합(複合)돼 있다. 하나는 금융위기이후 해외로부터 수입된 <수입 대불황(輸入 大不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국산 소불황(國産 小不況)>이다. 수입 대불황에 대해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국산 소불황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 불황은 단순한 순환적 불황이 아니다. 간단한 상식적 방법으로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경제 전반에 걸쳐 불황의 뿌리가 깊이 내려져 있다.

(2) 이 불황의 원인은 개발연대 이후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수출·성장 지상주의(輸出·成長 至上主義)로 일관하면서, 이것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사항은 당연히 받아야 할 정책상의 배려(配慮)를 받지 못해서 크게 위축(萎縮)됐다는 데 있다. 개발연대는 사실 나라 경제가 어렵기는 했으나, 국내외 사정은 수출·성장에 매우 유리했었다. 당시의 수출은 가발(假髮), 합판(合版), 완구(完具) 등 경공업제품(輕工業製品)이었다. 우리나라는 원자재(반제품)를 수입하여 가공해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당시의 정부는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수출·성장에 전념(專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가들은 유능했고 근로자는 낮은 임금을 감수(甘受)했다. GNP 성장률은 높아서 1·2차 5개년 계획은 성공리에 끝났다.

(3) 자신을 얻은 정부는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삼선개헌(三選改憲)을 하고 곧 이어, 대통령 종신집권(終身執權)을 보장하는 유신헌법(維新憲法)을 공포했다. 유신체제를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해 중화학산업(重化學産業)을 수출산업으로 발전시켜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여 일거에 선진권에 진입할 것이 필요했다. 일체(一切)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人的, 物的 資源)이 중화학 육성에 투입됐다. 이런 과정에서 한강의 기적이 달성됐다. 74~75년 석유파동이 있었으나, 정부는 종전의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했다.

(4) 중화학 육성에는 부작용이 많았다. 첫째, 중소기업과 내수산업이 매우 낙후(落後)하게 됐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점점 고용문제가 뒤따르고, 또 중화학 이외의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 <경제의 기반>이 마련되지 못한 것이다. 역대정부가 모두 겉으로는 중소기업 육성을 외쳤으나 성공은 거의 없었다.

(5) 교육, 정치, 사회, 복지 등의 분야의 건전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에는 이런 것은 자연히 발전되기를 기대했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분야들이 모두 소홀히 된다는 것은 <경제외적 기반(經濟外的 基盤)>의 취약(脆弱)을 외면한 것이 된다. 이것은 바로 <나라의 기반>이 취약(脆弱)하다는 의미이다. 역대 정부가 모두 이 일을 소홀히 했다. 나라의 문화의 저질화(低質化)를 보고만 있었을 뿐, 의미 있는 대책을 강구하지는 못했다. 오늘에 와서는 <경제 외적 기반>의 취약이 경제성장 자체의 발목을 잡고 있다.

(6) 우리 경제의 성장을 가지고 올 수단은 무엇인가. 첫째, 중소기업과 내수산업을 육성하는 일이다. 이 일을 하지 않고는 <경제의 기반>을 굳힐 방법은 없다. 둘째, 교육제도와 내용을 개혁하고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방방곡곡까지 뻗어있는 부패를 바로 잡아야 한다. 나라가 이렇게 부패해서는 이루어 질 것은 없다. 이런 것이 <경제 외적 기반>을 닦는 일인데, 이것이 곧 <나라의 기반>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원래 취약한 <나라의 기반>이 오랜 풍화작용(風化作用)을 통해 심히 부식(腐蝕)돼 있다.

(7) 중소기업과 내수산업은 무엇이 하는가. 사람이 한다. 교육과 정치는 무엇이 하는가. 사람이 한다. 나라의 좋은 전통, 훌륭한 문화는 무엇이 만드는가. 우리가 해야 한다. 결국 경제나 나라가 되고 안 되고는 사람에 달려 있다. 개발연대(開發年代)부터 지금까지 역대정부(歷代政府)는 모두 겉으로 보이는 수출·성장률(輸出·成長率)의 숫자, 대학의 숫자 등의 지표에 매달려 가장 중요한 나라의 주인(主人)이자 목적인 사람, 사람의 질(質), 교육의 질(質)은 등한시(等閒是)했던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사람을 근본(根本)으로 여기는 정치를 해야 하고, 고용(雇用)을 위주로 하는 경제정책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인본주의(人本主義)>이다.

사람은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共同體, community)의 일원(一員)이다. 가족(家族), 사회(社會), 국가(國家)의 일원인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共同體)의 번영(繁榮)을 위하여 응분(應分)의 힘을 보태야 한다. 이런 사회는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다. 이런 사회를 옛날에는 <대동사회(大同社會)>라 했다.

(8) 이 비상시를 당해, 대한민국(大韓民國) 사람들은 고식적(姑息的)인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리고, 발상(發想)을 전환(轉換)해서 성장의 질곡(桎梏)을 뿌리치고 <인본주의(人本主義)>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실현했으면 좋겠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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