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피케티 추종자들은 어쩔 셈인가
불평등론은 원시시대 이후의 오랜 정신적 피난처였다. 불평등이 구조적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불평등을 조용히 참아내라고 가르친다. r>g 공식을 내세운 피케티는 그 반대다. 그는 혁명을 부추긴다. 자본수익률 r이 언제나 경제성장률 g보다 높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주장은 한국에서도 인기였다. 불평등의 증거를 찾아 헤매던 좌익 논객들은 피케티를 내세우면서 자본주의를 저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벌어졌다. 피케티가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철회하고 만 것이다.

학자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사소한 실수로 치부하고 만다. 대세에 영향이 없고 결론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케티도 그랬다. 파이낸셜타임스 편집장 가일스가 일곱 가지에 이르는 수치 조작 사례를 적시했을 때나 맨큐가 r>g를 논박했을 때도 피케티 진영은 사소한 실수라고 코웃음을 쳤다. 불평등을 팔아 먹고사는 폴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는 더욱 그랬다. “미국 경제학 논문의 40%에서 발견되는 통상적인 오류”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어떻든 피케티의 논문에서도 팻 핑거(fat finger·단순 실수), 숫자 비틀기(tweaks), 평균치 조작, 가공의 데이터 삽입, 비교 연도 조작, 제멋대로 잣대, 입맛에 맞는 숫자 고르기 (cherry picking) 등이 발견되었다. 외삽과 내삽도 무리하게 자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 미국 내 불평등이 급상승하는 통계는 그렇게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조작된 수치를 제거하면 미국의 불평등은 오히려 조금씩 개선되는 추세였다.

무려 687개의 각주를 달았고, 어디서 수집했는지가 궁금할 정도인 120개에 달하는 도표와 그래프들은 논문을 읽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무려 700쪽에 육박하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은 전문서적으로서는 놀랍게도 전 세계에서 150만부나 팔렸다. 무너져 내린 마르크시즘의 화려한 부활을 암시하듯 책 제목도 21세기 캐피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100년간 r>g의 증거가 충분히 발견되지 않았고 다른 인구적 요인들이 더 컸다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이 공식이 부의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 유일하거나 중요한 도구가 아니며 불평등의 궤적을 예측하는 데도 중요한 수단이 아니다”는 결론은 그렇게 나왔다. 그는 이 고백 논문을 지난해 12월31일 조용히 발표했다. 오는 5월엔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지에 게재할 계획이다.

사실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성공의 동인이며 동시에 결과라고 앵거스 디턴은 설명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평등의 주된 요인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고령화는 무엇보다 개인 능력의 격차를 장기화한다. 1990~2010년 한국 내 소득불평등 문제를 분석한 홍석철(2012)은 한국 빈부격차의 4분의 1은 노령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성의 사회진출, 특히 고학력 여성의 사회진출이 미국 근로자가구 소득불평등의 3분의 2를 설명한다는 연구(버틀리스·1999)도 있다. 한국에서는 최바울(2013)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여기에 1인 가구 급증이 빈부격차를 확대시킨다는 것은 인구통계의 필연적 결과다. 2012년 기준으로 2인 이상 가구의 지니계수는 0.29였으나 1인 가구를 포함하면 0.33으로 훨씬 악화된다. 이 추세만으로도 2050년이면 소득불균형 정도가 2008년 대비 25.7%나 커진다는 것이다. 불평등이 다소간 심화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의 실패나 저주 때문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밝혀진 셈이다. 수명연장, 여성의 사회진출 등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발전의 결과로서 빈부차가 확대되고 있을 가능성이라면 대책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피케티류의 징벌적 과세론은 자본주의의 성공을 처벌함으로써 현대 문명을 중세적 약탈 체제로 전환시키려는 마르크스적 음모에 불과하다. 피케티는 발을 뺀다고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어쩔 셈인가.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