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연방 판사 된 존 리 "저의 오늘은 자식 교육 위해 희생한 부모 덕이죠"
“하버드대 철학과 신입생 시절엔 학교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생활비를 벌었어요. ‘GAP’ 같은 옷가게에서 몇 년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요즘도 옷 하나는 정확하게 갭니다.”

지난 11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만난 존 리(46) 미국 연방법원 판사는 스스로 학비를 벌었던 대학 시절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존 리 판사는 2012년 6월부터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주 북부지방법원에서 연방판사로 일하고 있다. 연방판사는 대통령 추천으로 상원 인준을 거쳐 임명되는 자리다. 그는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초빙교수로 ‘미국 민사재판 실무’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존 리 판사는 1968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파독 광부, 어머니는 파독 간호사였다. 그의 부모는 독일에서 존 리 판사가 두 살 때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다섯 살이 돼서야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는 “미국에서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로, 어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나와 두 명의 동생들을 교육시키려 온 힘을 쏟으셨다”고 회상했다.

대학생 시절에는 그리스·로마 고전에 푹 빠져 지냈다. 주인공이 세계 곳곳을 떠돌며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내용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가장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독일 한국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긴 했지만 이민 1.5세대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며 “세상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세상 속에 조화롭게 녹아 들어가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이 마치 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엔 대형 로펌 대신 미국 법무부에 들어가 환경과 천연자원 관련 소송 업무를 담당했다. ‘법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자’는 학생 때의 포부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존 리 판사는 “하버드 예일 등과 같은 유명 로스쿨에선 졸업생이 시민단체 비영리재단 정부 등 공적 영역에서 일하면 대출받은 학자금을 감면해주거나 상환을 유예해준다”며 한국 로스쿨이 인재를 유치하려면 이런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법무부를 그만둔 뒤엔 시카고의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 자리까지 올랐다. 아시아 출신 이민자지원단체와 무료법률상담단체(CARPLS)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 출신도 성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미국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는 “돈이 없어 제대로 된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존 리 판사는 고액 연봉을 받는 파트너 변호사를 그만두고 판사가 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돈은 그저 돈이고 나이가 들수록 돈은 중요하지 않다”며 “한 명의 판사가 내리는 올바른 판결은 세상을 크게 바꿀 수도 있기 때문에 보람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