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요즘은 삼성전자, LG전자에 많이 진출했고 주요 스마트폰의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만들고 있다.” “스마트폰을 쓰다 불편하면 제자들에게 전화해 ‘이 따위로 불편하게 만들었느냐’며 야단을 친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한국연구재단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기관이다. 하지만 대학 교수, 출연 연구기관 연구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기관이다. 연구재단은 정부의 연구개발(R&D), 인재양성 사업 등을 기획하고 관련 예산을 배분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올해 재단이 대학, 연구소에 나눠줄 예산은 R&D 2조5000억원, 인력양성 9000억원 등 총 3조6993억원에 달한다. 미래창조과학부, 교육부의 기초연구에서부터 우주, 원자력 연구, 대학 인력양성까지 총괄한다. 당연히 재단 이사장의 권한도 막강하다. 연봉과 예우 등이 장관급이다.

대한민국 학술 연구계의 수장 격인 정민근 한국연구재단 이사장(64)을 서울 역삼동 샤부샤부 전문점인 ‘테무진’에서 만났다. 1975년 명동을 시작으로 39년간 일본 전통 샤부샤부와 스키야키(일본식 전골)를 서비스해 온 집이다. 정 이사장은 “일제시대 일본에서 유학하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스키야키를 접했다”며 “이 집은 음식 재료가 신선해 서울에 올 때 자주 찾는 집”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음식은 두 종류로 주문했다. 정 이사장이 앉은 자리는 스키야키, 다른 쪽은 샤부샤부를 시켰다. 대표 음식을 골고루 맛보라는 취지였다. 주문이 끝나자 개인별로 채소와 호박죽이 나왔다. 팬에 살짝 기름을 두르고 배추, 양파, 쑥갓 등의 채소를 굽기 시작하니 구수한 냄새가 올라왔다. 고기를 구울 때는 간장 소스를 살짝 넣는 게 스키야키 방식이다.

인간공학은 융합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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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취임한 정 이사장의 전공은 인간공학이다. 경기고,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1984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인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인간공학을 사람이 물건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987년 포스텍 교수로 부임하며 한국에 돌아온 정 이사장은 보행분석연구실을 설치해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등과 학제 간 연구를 진행했다. 울진 원자력발전소, 포스코 등의 근무 환경을 분석해 요통 등 근골격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작업장 설계 작업을 맡았다. 정 이사장은 “제자들이 요즘은 삼성전자, LG전자에 많이 진출했고 주요 스마트폰의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만들고 있다”며 “스마트폰을 쓰다 불편하면 제자들에게 전화해 ‘이 따위로 불편하게 만들었느냐’며 야단을 친다”고 했다. 이어 “의상학과 교수, 의대 교수 등과 함께 학제 간 연구를 하는 일이 많은 분야”라며 “연구재단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인문과 과학의 융합인데 그 역할은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었다.

돈 때문에 인간공학 선택

샤부샤부와 스키야키는 채소와 고기를 살짝 익혀 자연식에 가깝게 먹는 음식이다. 테무진은 유기농 채소와 한우, 제주산 흑돈을 사용한다. 좋은 재료의 풍미를 있는 그대로 맛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처음에는 채소, 다음으로 버섯과 두부, 그리고 고기 등을 차례로 구워 소금(천일염)과 달걀(유정란)에 찍어 먹으니 담백한 맛이 좋았다.

2남1녀의 막내인 정 이사장은 학창시절 적성검사에서 상경계가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이과를 선택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장사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다짐한 생각이다. 대학 진학을 앞둔 시기 외국 잡지에서 산업공학을 소개한 글을 보고 마음이 끌렸다. 당시 국내에서 이와 가장 비슷한 학과를 찾아낸 게 서울대 생산기계공학과였다. 정 이사장은 “1970년 생산기계공학과 1회 신입생으로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 학과 이름이 산업공학으로 바뀌었다”고 소개했다.

학과를 신설했지만 당시 국내에 산업공학을 가르칠 교수진은 부족했다. 제대로 공부해보기 위해 이 분야 최고인 미시간대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돈이 발목을 잡았다. 수학모형으로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게 그의 석사 전공이었는데 이 분야에는 돈이 많지 않아 박사과정 장학금을 지원받기 어려웠다. 어쩌다 기회가 생겨도 우선순위는 미국 학생이었다. 석사 후 2년 동안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결국 바꾼 전공이 인간공학이다. 정 이사장은 “석사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는 데만 6년이 걸렸다”며 “말하긴 우습지만 돈 때문에 전공을 바꾼 셈”이라고 했다.

도전적 R&D 늘려라

정 이사장은 술을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유형에 속한다.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폭탄주는 피한다. 이날도 서로 부담을 주지 않으려 맥주를 주문해 반주로 삼았다.

취임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 이사장은 벌써 업무 파악을 끝내고 올해 중점 추진할 업무 방향까지 정했다. 우선 R&D 지원과 관련 기초과학은 창의성, 도전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응용과학은 사업화 등 창조경제 구현에 힘을 쏟도록 투트랙 지원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모두가 성공하기 쉬운 안전한 연구에만 나서는 문화를 바꾸기 위해 한국형 SGER(Small Grant for Exploratory Research) 제도도 확대한다. 그는 “실패 위험이 높은 아이디어의 초기 연구 지원을 늘리는 대신 성과가 없어도 페널티 없이 다른 과제에 도전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정 이사장과 가까운 지인들은 대부분 경기고 동문이다.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 김도연 전 국가과학기술위원장 등이 동기다. 정갑영 연세대 총장은 대학시절 교회에서 친해져 지금도 자주 만나는 친구다.

운동으로는 수영, 검도 등을 즐긴다. 1990년대 후반 시작한 서예도 소일거리 중 하나다. 인문학 서적도 즐겨 읽는 편이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기술이 대두한 것은 200년에 불과하지만 인문학은 늘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건을 사고 싶게 만드는 기본 욕구를 이해하려면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런 그를 닮아서일까. 정 이사장의 두 아들은 공학을 전공하다 예술 분야로 돌아선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학에서 신소재공학을 전공한 장남은 졸업 후 돌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는 전자공학 석사까지 마친 뒤 영화감독에 도전했다.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뛰어들다 보니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진로를 바꾸는 두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는 “처음에는 설득하고 혼도 냈지만 안돼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공계 인재가 대한민국 미래

샤부샤부 집이 늘어난 요즘은 육수의 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테무진은 해산물, 채소, 과일만으로 육수를 끓여 국물 빛깔이 맑다. 식사용으로 국수를 삶았는데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식사가 부족한 사람을 위해 스키야키 팬에 볶음밥을 주문했다.

자식들의 뜻을 꺾지 못했지만 정 이사장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이공계에 인재들이 넘쳐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국연구재단이 한국경제신문과 함께 주관하는 이공계 인재 육성 캠페인인 ‘스트롱코리아’ 행사도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이공계 덕에 먹고 산 것”이라며 “상위 5% 인재가 의대로 가고 있는데 그들의 발길을 이공계로 돌려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공계 인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덕연구단지를 만든 1970년대처럼 연구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당시 대덕 연구소의 실장들은 ‘나는 언제 저 자리 가나’ 생각하게 만드는 롤모델이었는데 이제는 가고 싶지 않은 자리로 위상이 떨어졌다”며 “미국의 NASA(항공우주국)처럼 특정 부처에 소속되지 않으면서도 공무원 신분을 보장받는 큰 연구기관이 생겨나야 하고 이들이 대학과 작은 연구소에 연구 재원까지 나눠주는 역할을 맡아야 관련 연구자들의 자긍심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반면 대학에서는 정교수를 선발할 때 20~30%를 떨어뜨리는 경쟁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피가 돌듯 대학과 연구소 간에 인재들이 순환하는 건강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이공계에 청년들이 몰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이사장은 이 같은 변화를 주도할 적임자로 박근혜 대통령을 꼽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잘 시작했는데 최근 20년간 연구자들을 너무 몰아붙이고 주눅들게 만들어 망가진 것”이라며 “아버지처럼 연구자의 기를 살려 젊은이들이 이공계를 동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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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진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샤부샤부 맛집이다. 천장이 높고 한쪽 벽면 전체를 유리로 구성해 탁 트인 느낌을 준다. 테무진은 1975년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한국 첫 샤부샤부 집으로 출발했다. 1970년대는 명동을 찾는 일본 손님이 늘어난 시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에는 잠실 롯데백화점에 신규 가게를 오픈했다. 현재 위치인 역삼동으로 옮긴 것은 2009년 8월. 창업자이던 이종범 사장이 별세한 뒤 부인 이경자 사장이 이어받아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제주 흑돈을 비롯해 유기농 한우, 채소 등을 사용해 좋은 식재료를 중시하는 손님들이 자주 찾는다. 샤부샤부 육수는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해산물, 채소, 과일로 만들어 빛깔이 맑으면서도 맛이 담백하다. 점심 특선인 소고기 샤부샤부는 1만5000원, 국수전골은 1만원. 저녁 메뉴는 샤부샤부와 스키야키 모두 고기 등급에 따라 2만4000원부터 5만원까지 다양하다. (02)2183-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