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우크라이나 사태…美-러, 천연가스 패권전쟁으로 번지나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 에너지시장의 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미국 정치권 안팎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장악과 관련, 유럽연합(EU)에 미 천연가스 수출을 허용해 러시아의 힘을 꺾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U는 천연가스의 30%를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미·EU의 경제제재에 맞서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그는 보복조치에 나설 경우 유럽 경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EU의 거듭된 경고와 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제재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며 고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이 같은 에너지 먹이사슬 때문이다.

◆“가스 수출로 러 협상력 약화시켜야”

꽉 막힌 우크라이나 사태…美-러, 천연가스 패권전쟁으로 번지나
EU가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천연가스 가운데 절반가량은 우크라이나를 관통하는 두 개의 가스관으로 운송된다. EU 국가 중 러시아산 가스를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독일(40%) 이탈리아(25%) 영국(12.5%) 등이다.

우크라이나는 가스의 70%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러시아는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 우크라이나로 통하는 가스관을 막은 적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가스대금 체납 탓이었다. 2009년 초 유럽에선 가스값이 폭등했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회사 가즈프롬은 지난 7일 “2009년 초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 정치권에선 푸틴 대통령의 콧대를 꺾기 위해 미국이 유럽에 가스를 수출해 러시아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존 베이너 하원 의장(공화당)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유럽 우방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가스 수출 승인 신청을 신속히 허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주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수출 법안을 제출한 테드 포 하원의원(공화당·텍사스주)은 “천연가스 수출은 러시아의 에너지 독점력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2007년까지 자국 내 천연가스 수요량의 16% 정도를 수입해왔다. 그러나 최근 셰일가스·오일(진흙 퇴적암층에서 뽑아낸 천연가스·원유)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천연가스를 캐나다 멕시코 등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미국은 올해 러시아를 제치고 천연가스 최대 생산국, 2020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최대 산유국이 될 전망이다.

◆‘게임체인저’ 될 수 있나

미국이 EU에 가스를 수출하려면 법을 바꿔야 한다. 현행법에 따르면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캐나다, 멕시코 등에만 수출할 수 있다. 다만 국익 차원에서 예외적으로 수출을 허용할 수는 있다. 그동안 접수한 예외적 수출 신청 21건 가운데 6건이 승인됐다. 하지만 이 역시 빨라야 2015년 하반기에 가능하다. 미 정부가 수출 신청을 허용하더라도 액화천연가스(LNG) 플랜트 등 인프라를 갖추는 데만 수년이 걸린다.

미국은 절대적인 수출 물량도 러시아에 턱없이 부족하다. 2012년 기준 러시아의 1일 천연가스 수출량은 200억큐빅피트, 미국은 44억큐빅피트였다. 수출 규제를 풀더라도 물량의 상당 부분이 인도나 중국 등 ‘엉뚱한 곳’으로 갈 공산이 크다. 아시아와 남미의 천연가스 가격은 유럽보다 높다. 100만BTU(영국 열량단위)당 가격은 미국이 4달러 안팎, 유럽은 11~12달러, 아시아는 15~16달러 수준이다.

민간 천연가스 업체들은 마진 높은 곳에 수출을 더 많이 할 게 분명하다. 정치컨설팅 회사 유라시아그룹의 이언 브레머 회장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가스 수출이 게임체인저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가스 수출 카드를 꺼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WSJ는 “미국의 ‘제스처’만으로도 글로벌 에너지시장, 나아가 러시아 천연가스 가격에 타격을 줘 러시아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주 어니스트 모니지 미 에너지부 장관은 “에너지 정책에 대한 조언을 환영한다.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가 카드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 암시였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