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대졸 여성공채 1기' 첫 임원의 조언 "끝까지 물고 늘어져라…남녀 차이 인정하라"
“인재 제일의 삼성이라더니 너무 실망입니다.”

김정미 제일모직 상무(43·사진)가 21년 전 삼성 본관 25층 인사팀의 방명록에 쓴 문장이다. 당시 인사 담당자는 삼성 입사 원서를 받으려고 인사팀을 찾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 “군필이에요?” 얼굴이 붉어졌지만 김 상무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저는 면제예요. 원서 주세요.”

하지만 지원서를 받지 못했다. 여대생이라는 이유에서 거부당한 것이다. 불과 20여년 전, 삼성도 그랬다. “방명록에 학점이나 써놓고 가라”는 직원의 말에 김 상무는 화가 나서 “(삼성에) 실망했다”는 글을 남긴 채 그곳을 나왔다.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3층 대회의실에서 20~30대 여성 100여명이 김 상무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삼성이 여성 임직원의 경험을 외부와 공유하기 위해 만든 ‘여기(女氣) 모여라’ 현장이다. 삼성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플러스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일반인 신청을 받아 초청했다. 이번 강연엔 1000명 넘게 신청이 몰려 10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김 상무는 얘기를 이어갔다. 좌절의 아픔을 채 삭이기도 전 그는 ‘원서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생각지도 않았지만 무척이나 반가웠다고 했다. 삼성물산으로 지원해 면접 때 받은 첫 질문은 “주량이 얼마냐”였다. “마실 만큼 마신다”고 답하자 “아프리카로 보내면 갈 거냐”는 질문이 따라왔다. “어디든 가겠다”고 답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사회생활에서는 이런 게 중요하구나.”

1993년 3월 김 상무는 천신만고 끝에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여성인재 중용 지시에 따라 그는 ‘대졸 여성 공채 1기’가 됐다. 당시 김 상무의 입사동기 139명 중 지금 현직에 남은 이는 30여명. 1999년 제일모직으로 옮겨온 김 상무는 2011년 동기 가운데 처음으로 ‘별(임원)’을 달았다.

김 상무의 강연이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공감의 탄성이 터졌다. 보수적인 대구에서 태어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기 238명 중 233명이 남자인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것부터가 도전이었다.

김 상무는 “뭐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필요하다”며 “당장 결실을 못 맺어도 나중에 부메랑처럼 기회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입사 이후에도 고난의 길이었다. 1년은 공장과 매장에서 일했다. 안양의 신사복 공장에서 땀흘리며 재봉질했고, 명동매장에서는 직접 걸레질을 하고 창고에서 쪽잠도 잤다. 그는 “젊을 때는 무조건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좋다”며 “직급이 올라가면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절대 못한다’던 영업에 지원했고 상품기획과 라이선스, 마케팅과 정산까지 두루 겪었다. 외환위기 때는 사직서를 쓰겠다는 독한 각오로 새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했다.

팀장 자리에 올랐을 때는 ‘리더십’이라는 또 다른 벽에 부딪혔다. 김 상무는 “리더십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내심, 포용력, 그리고 조직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문성과 실력보다는 소통능력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기 쉽다”고 했다. 이를 넘어서려면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라고 조언했다. 남성에 비해 개인 우선이고 관계 중심적이며 스트레스에 취약한 여성의 약점을 완벽하고 섬세한 강점으로 바꿔가라는 것이다.

배우자를 택할 때는 스펙(조건)보다 가치관을 따져볼 것을 권했다. 김 상무는 “배우자 조건이 좋을수록 여성은 일을 포기해야 할 확률이 높다”며 “슈퍼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일과 삶의 균형을 잡으라”고 조언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며 “엄마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하라”고도 했다.

여성복사업부를 이끌고 있는 김 상무는 제일모직에서 글로벌 여성복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 목표다. “문화산업인 패션 부문에서 선진국의 장벽은 높지만 한국의 성장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자신한다. 그는 지금도 도전 중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