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주의' 탄생 뒤에는 '지독한 아버지'가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알기로는 케인스의 지성이 가장 예리하고 가장 명료하였다. 그와 논쟁할 때 나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무언가 좀 바보스런 감정이 들지 않고는 좀처럼 토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논리철학의 대가인 버트런드 러셀이 자서전에서 자신보다 열한 살 적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에 대해 한 말이다. 케인스가 얼마나 논쟁적이었으면 당대의 철학자가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을까. 러셀과 케인스는 영국의 지식인그룹을 대표하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었다.

케인스는 정치경제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아버지의 지적 유산과 아버지의 스승이며 동료였던 윤리학자 헨리 시즈위크,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의 그림자 속에서 성장했다. 공무원을 하다 마셜의 제안에 따라 킹스 칼리지의 강사가 된 케인스는 마셜의 경제학을 강의하면서 ‘케인스주의’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1936년에 발표한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다.

그런데 메이너드 케인스는 철저하게 아버지에 의해 기획된 인재였다. 케인스는 이튼칼리지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가면서 천재의 탄생을 예고한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메이너드 케인스가 천재성을 드러내기까지는 아버지 네빌 케인스의 치밀한 자녀교육법이 있었다. 먼저 아버지는 아들을 인문학의 바다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이튼에 입학하자마자 개인교사를 붙여주었는데 고전에 해박한 새뮤얼 거니 리벅이라는 이튼의 보조 교사였다.

후일 메이너드가 중세 운문 등 시에 심취하고 가장 뛰어났던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것도 리벅의 영향이었다. 수학에 재능을 보였던 아들에게 좌뇌뿐 아니라 우뇌를 계발해주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메이너드는 수학과 경제학뿐만 아니라 논리학과 심리학 등에서도 뛰어났다.

케인스를 키운 또 하나의 비결은 ‘편지쓰기’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이튼에 입학하자마자 “공부가 진행되는 상황을 매주 내게 알려 주기 바란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쓰기는 그가 일곱 살 때부터 시작한 습관이었기에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공부 방법, 시험 기술, 글쓰기 스타일, 일반적 품행에 관해 끊임없이 지시를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학업이나 교우 관계, 시험 성적 같은 것에 대해 아들 못지않게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메이너드는 아버지에게 매주 한 번씩 편지를 썼고 답장을 통해 아버지의 학문적 에센스를 흡수하면서 지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케인스는 이튼 시절에 도서관에 틀어박혀 자신의 ‘족보’를 직접 조사했다는 사실이다. 청소년기에 자신의 뿌리를 연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족보 연구를 통해 케인스는 자신의 선조가 11세기에 지주계급이었다는 ‘사라진 영광’을 발견했다. 노르망디 윌리엄 공의 이복형제인 모르탱 백작의 봉신이었고 전투에 참가한 공로로 백작으로부터 5000에이커가 넘는 영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조들에 자부심을 느끼고 ‘JMK’를 서명으로 사용했다.

케인스 가문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상업으로 재력을 일군 할아버지 존 케인스에 이르러서다. 할아버지는 열 살에 붓 제조업의 수습사원으로 시작해 달리아와 장미 등 원예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아버지인 네빌이 부친의 재력을 바탕으로 케인스 가에 학문적 위상을 확보했다면 아들 메이너드는 아버지의 학문적 성취를 배경으로 일취월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자녀경영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