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외교관은 와인을 마신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와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왕들끼리 주고받는 선물이었고,통치자가 외국 방문객이나 사절 접대에 사용하는 등 외교와는 깊고 오랜 연관이 있다.

물론 현대의 치열한 식탁외교에서도 와인은 빠지면 안 될 필수 음료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외교무대에서 와인은 단순히 식탁 분위기를 띄우는 반주 외에도 중요한 메시지의 전달 수단이 되는가 하면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경우도 있다.

2004년 7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제주도에서 만나 우호적인 회담에 이어 풍성한 만찬을 함께 했다. 그러나 다음해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을 조례로 가결시킨 직후 서울에서 마주앉은 두 정상의 오찬에는 식단도 줄고 와인은 서빙조차 되지 않았다.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 총리의 이중적인 태도에 한국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전달된 것이다.

국제 만찬에 사용되는 와인의 선정 기준은 목적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먼저 귀빈의 모국이 우수한 와인 생산국이라면 이들을 우선적으로 와인 메뉴에 포함시키는 것은 상대국에 대한 조그만 배려다. 물론 프랑스 같이 자국 와인에 대한 우월의식이 강한 나라에서는 이런 배려를 기대하기 어렵다. 만약 주최국에도 내세울 만한 와인이 있는 경우는 화이트와 레드를 달리해 상대국과 자국의 와인을 함께 조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에서 가진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와의 오찬 메뉴는 한식이었지만,곁들여진 와인들은 뉴질랜드산 화이트와인 '클라우디 베이'(Cloudy Bay)와 레드와인 '도그 포인트'(Dog Point)였다. 남반구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여성 총리는 기대치 않게 자국 와인이 서빙된 것에 무척 고마워했다고 한다. 또한 역대 대통령 취임 만찬에 자주 사용돼 대통령의 와인으로 소문난 캘리포니아산 '클로 뒤 발'(Clos du Val)이 한국을 방문하는 미국 대통령의 환영만찬 때마다 유수한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귀빈이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좋아하는 와인이 있는 경우에는 선택이 다소 용이해진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의전상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급 와인들을 준비하지만 특별히 신경을 써서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경우도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을 방문한 노 대통령의 환영만찬에 내놓은 와인은 보르도산 2등급 와인 '그로 라로즈'(Graud Larose)였다.

그러나 영국 왕실에 오랫동안 마음의 빚을 지고 있던 프랑스 정부는 2004년 4월 영불협정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여왕을 위해 예산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메인 와인은 물론 식전 주부터 디저트와인까지 모두 최고 · 최상의 와인들을 준비해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 두 분이 2000년 6월과 2007년 10월 각각 북한을 방문했을 때,김정일 위원장은 두 번의 환영만찬에 모두 프랑스산 와인을 내놓았다. 먼저 김대중 대통령은 '샤토 라투르' 1993년산을 대접받았다. 이 와인은 보르도의 5대 샤토 와인 중 하나로 최고급 와인의 대명사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국가 수반들의 만찬에 자주 등장하는 와인으로 김 위원장의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극진한 환영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노 대통령을 위한 환영오찬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부르고뉴의 '미셸 피카르'(Michel Picard) 와인이 서빙됐다. 물론 김 위원장 개인이 즐기는 피노누아 품종의 뛰어난 와인이지만 외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다소 의아한 선택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와인 맛에 대한 조예도 깊지 않고 분단된 민족의 지도자들끼리 오랜만에 함께 하는 역사적인 만남이니 만큼 와인보다는 남북의 유명한 토속주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자리였다.

어쩌면 김 위원장은 두 번의 결정적인 기회를 이용해 와인을 통한 본인의 이미지 마케팅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먼저 김 대통령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없는 특급 와인을 대접해 최상의 환영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본인이 와인애호가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노 대통령의 경우에는 크게 비싸지 않으면서 매혹적인 붉은 색에 섬세한 향을 가진 와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와인마니아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미사일과 핵무기로 각인된 강성의 독재자 이미지를 와인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부드럽고 세련된 지도자 이미지로 바꾸는 데 조금은 성과를 본 듯하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 sowhatcho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