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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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아버지의 지적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다. 윗동네 사는 어른께 아버지가 편지 심부름을 시켰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요즘 말로 손편지가 소통꾼이었다. 걸음이 불편한 아버지는 내게 편지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편지를 써서 들려주며 아버지는 답을 받아와야 한다거나 전해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을 꼭 했다. 그날은 답을 받아오는 거였다. 그 어른이 답장을 쓰시는 동안 내준 떡을 먹느라 오래 걸렸다. 답장을 받아들고 집이 보이는 언덕으로 뛰어올 때 아버지를 만났다. 돌아올 시간을 넘기자 아버지는 해가 넘어가는 눈 덮인 언덕길을 올라와 기다렸다. 받아든 편지를 다 읽은 아버지는 한참을 서 있다 느닷없이 언덕길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둘이 서서 내려다본 눈 덮인 언덕길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백여 미터 언덕에 찍힌 큰 발자국은 오른쪽에 아버지 지팡이 자국과 함께 일직선으로 곧바로 언덕을 올라왔다. 왼쪽의 작은 발자국은 내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이 어느 하나도 모양새 좋게 찍히질 않았다. 삐뚤빼뚤대다가 미끄러지기도 한 발자국은 내가 어떻게 언덕길을 걸어 올랐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똑바로 걸어라라고 운을 뗀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걸어서는 안 된다. 네가 한 일은 저 발자국처럼 고스란히 남는다. 앞 발자국만 찍힌 건 성급함을 뒷 발자국만 찍힌 건 오만함을 말해준다. 어떻게 걸어왔는지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걸어갈 건지를 알 수 있다. 남들도 네 걸음을 다 본다고 했다. 이어 먼 데서 봐도 네 걸음인 걸 알 수 있게 걸어라. 앞을 똑바로 보고 보폭을 일정하게 해 속도를 똑같이 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특히 걷는 너를 옆에서 누가 밀치더라도 그대로 걸을 수 있게 다리에 힘을 줘서 또박또박 바로 걸어야 한다. 두 번 다시 걷지 못할 것처럼 힘차게 걸어가라라고 했다.

해가 이미 넘어간 언덕길을 내려다보며 아버지는 그날도 여지없이 고사성어를 말씀하셨다. 군에서 다리를 다친 아버지는 걸음걸이를 다시 배웠다고 했다. 저 성어는 몇 달 동안 의족에 의지해 절뚝거리는 파행(跛行)을 고치려고 힘들게 연습할 때 치료사가 알려줬다고 했다. “아무도 너를 거들어주지 않는다. 제대로 걸은 걸음은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땅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아버지는 기억했다. 그렇게만 기억한 말을 훗날 찾아보니 그날의 고사성어가 선행무철적(善行無轍迹)’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27장에 나오는 말이다. 저 말은 해석이 여러 가지다. 그중 뒤 문장과 호응 관계를 따져보면 착한 행실은 자국이 없다라는 뜻이다. 선행은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해석이 좋다. 원뜻을 아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어디에도 의지하지 말고 걸어라라고 해석하며 독립심(獨立心)’을 여러 차례 주문했다.

그 후에도 내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라. 오직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라며 몇 번이나 바른걸음 자세를 요구했다. 나중에 비로소 알게 된 저 말은 석가모니 말씀이다. “인간이 직립(直立)한 뒤부터 의지하기 시작했다라고 한 아버지는 내가 다쳐서 집에 업혀 왔을 때는 그 자리로 되돌아가서 성한 네 다리로 온전하게 걸어오라고도 했다. 걸음걸이뿐 아니라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는 돈을 준 일이 없다. 때로 어머니가 주시긴 했지만, 아버지는 용돈을 얻게 된 경위를 꼬치꼬치 캐물었고 일일이 정당성 여부를 가늠해 걸음걸이 때처럼 야단과 지적을 반드시 했다.

손주들이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자 퍼뜩 떠오른 고사성어다. 사람은 결국 혼자 걷는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올바르게 걷는 걸음은 일찍부터 알려줘야 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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