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에 대하여 (딸에게 보내는 경제편지)
자유무역에 대하여
그림 : http://blog.naver.com/smilevirus12/150133364461


요즘은 자유라는 말이 참 자유스럽게 쓰이는 것같다만, 사실 그 안에는 많은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고, 쓰는 사람들마다 용도가 많이 다르다. 울 큰 딸은 무역학과에 다니니까 ‘자유무역’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럼 리카도의 비교우위론과 절대우위론에 대하여 배웠지. 뭐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각자의 나라는 더 잘하는 것에 집중해서 만들어서 무역 상대국에 팔면 서로 이익이다라는 거지. 쉽지? 그리고 이 자유무역론이 현대 세계 경제의 흐름에서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야. ‘신자유주의’라는 것도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각 나라가 발전하기 위하여는 각자의 장점에 맞추어 정부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물건을 교환하면 좋아질 거라고 하는 거니까. 그리고 무역에 참가하는 모든 나라들은 공평하게 부자가 된다고 해. 자유무역이 제대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있는 게 90년대 초쯤부터이거든. 그리고 그 때부터 세계 경제가 상당히 활성화되면서 경제규모는 급격히 커지고, 우리가 시장에서 살 수있는 물건들의 값은 오히려 떨어졌잖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90년대 이전보다 더 잘살고 있고. 왜 90년대부터라고 보냐고? 80년대 말, 90년대 초 구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경제개발을 본격화할 때가 그 때부터거든. 그 전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나뉘고 서로 견제를 하면서 상대방과의 교역이 지극히 제한되었었지. 하지만 공산진영이 무너지자, 자유자본주의 진영에서 네오콘(신 보수주의)이 득세를 하면서 자유무역이 힘을 받게 되지. 그러면서 제한되었던 시장경제체가 이만큼 강하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를 더욱 강화하면서부터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아빠가 대학때부터 따지면 벌써 거의 30년째 무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데, 요즘은 점점 ‘그게 아닌 데 ~’하는 생각이 들고 있어. 사실 아빠는 자유무역으로 인하여 사업의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 우선 경쟁자가 너무 많아졌어. 전에는 바이어를 한번 만나며 그래도 몇 년은 했거든. 왜냐하면 새로운 사람을 찾기가 힘드니까. 그런데 요즘은 모든 정보가 인터넷에 떠있고, 모든 사람이 무역을 할 수있는 데, 게다가 중국산의 저가공세가 만만치 않거든. 그게 무역을 하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동네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중국산, 태국산, 베트남산 제품들과 경쟁을 해야하잖아. 아! 가격이 싸져서 소비자들이 좋아졌다고. 글쎄, 그게 그렇게만 끝나면 좋은 데, 소비자들도 어디선가는 자신의 물건이나 노동을 팔아야 소비를 할 수있는 데, 그게 어려워졌거든. 그러니 꼭 살기 좋아진 것만은 아니지. 예를 들어 대형마트들이 물건을 외국에서 수입하여서 국내에 판매를 하면, 그만큼 국내의 일자리가 줄어들지. 이럴 때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 ‘중국에서 엄청나게 물건을 수입해서 싸게 팔아 미국의 소비자 물가를 내려준 월마트가 과연 미국에 이로운 가?’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잖아.



그래, 좋아, 그건 그냥 우리나라에 관한 문제라고 치자. 그럼 왜 베트남은 여전히 가난하고, 태국이나 중남미국가들은 부자가 되지 않았지. 세계의 모든 나라가 골고루 부자가 된 게 아니고, 부자나라는 여전히 부자이고 가난한 나라는 여전히 가난하지. 뭐가 잘못되었을까?



에릭 라이트너가 지은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라는 책이 있거든. 그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애덤 스미스는 제조업이든 상업이든 인간의 경제활동을 모두 일체의 품질을 배제한 노동시간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리카도의 무역이론의 단초를 마련했다. …… 리카도 이론구조에서는 어디에도 석기시대의 노동시간과 실리콘 밸리의 노동시간을 구별해 주는 것이 없다. 완전고용도 보장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통용되는 국제 무역이론에서 실리콘 밸리와 새로 발견된 아마존 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부족사이에 이루어지는 자유 무역이 임금균등화라는 경제적 조화 (요소 균등화)를 창출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할 수있다.”



이처럼 요즘에는 ‘자유무역’에 대한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과연 자유무역 내지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 맞는 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논란의 핵심은 경제학이 최근 걸어왔던 연구방식에 대한 비판이야. 어떤 현상을 분석하는 데 지나치게 단순화하였고 수식화하면서 경제학자들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고,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거지. 예를 들면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는 여러 가지 전제가 있어.

. 수송비가 없다는 전제,

. 두 가지 제품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경제밖에 없다는 전제

. 교역되는 제품의 품질이 균일하다는 전제

. 생산요소가 완전히 유동적이라는 전제

. 관세나 기타 장벽이 없다는 전제

.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 모든 판매자와 구매자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값싼 제품이

어디 있는 지 알고 있다는 전제.



굉장히 비현실적인 전제이지. 이런 전제하에서 경제학자들은 현실의 모든 문제를 수식화하려고 하였지만, 사실 수학은 변수가 4개만되어도 풀 수가 없어.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4차원의 세계라고 하지. 세상에는 수학을 적용할 수있는 돈의 흐름말고도, 사람의 변덕스러운 마음도 있고, 전 세계의 문제가 얽혀져있는 정치도 있거든. ‘국제무역론’을 지은 도미니크 살바토레같은 학자는 비교우위론의 여러 가지 기본적 가정인 ‘2국 2상품’, ‘운송비등 이동에 대한 제약없음’, ‘기술수준 동일 및 불변’등을 현대에 맞게 확대시켜가면서 여전히 비교우위론은 현실에 적용할 수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유무역을 해야한다고 한다고 하기도 해.



그런데 장하준의 ‘사다리걷어차기’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그럼 개발도상국은 앞으로도 여전히 유치산업을 보호하지 못하고, 현재의 기술수준의 차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도 비교우위론에 따른 1차산업 내지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해야하나?’라는 물음으로 돌아온다. 농업이나 섬유 봉제업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혁신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거지. 수확체증이란 물건을 처음 만들 때는 기술도 없고 생산설비의 효율이 낮아 100명이 100시간을 일할 때 100개의 제품을 만들어 내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산성이 증가하면서 같은 노동과 시간을 투자해서도 130개를 만들어 낼 수있는 효율성을 이루게 되는 걸 말해. 그리고 혁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기존의 현상을 몇 단계 뛰어넘는 새로움을 이루기가 어렵게 되고, 계속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지.





사실 지금의 경제이론은 선진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들도 경제가 2차산업인 제조업이 발전하기 전에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제한하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썼거든. 그런데 이제 자기네들은 충분한 발전을 이루었고 경쟁력이 있으니, ‘자유는 좋은 거야!’하고 외쳐대고 있고 민주주의와 그럴 듯하게 이어지니까 아직 경제학이 발전하지 않은 나라들에서 받아들여진거지. 그 최악의 결과로 꼽는 사례는 바로 러시아야. 말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구소련이 붕괴되자, 역시 갑자기 집권하게된 러시아의 정책입안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니까 미국의 경제학자들에게 자문을 요청했지. 그러고 당연히 이들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론을 역설하였고. 그 결과 구소련의 제조업은 상당부분 붕괴되었고, 석유나 무기같은 경쟁력있는 분야는 러시아마피아에게 점유되면서 일반 대중은 더욱 못살게 되고, 국가 전체의 부는 극히 일부분에게 넘어가서 사회 전체가 양극화되었지. 반면에 단계적 경제성장을 하면서 가난을 벗어나 세계 경제에서 선도적 입장을 갖게 된 한국은 자유무역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좋은 사례가 되고 있고.



그러니까 이미 황새가 된 선진국들이 맵새들보고 나처럼 빨리 성큼성큼 걸어봐하고 하는 거야. 다 자기에 맞는 산업이 있고, 이를 단계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래서 뭐든지 적당히 하자는 말이 있듯이, 자유무역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말하지. 그럼 그 적당히는 무언데?. 아, 그거는 정책을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놓자. 아빠도 소시민이잖아. 그 것까지 신경쓰려면 머리 더 빠진다. 아빠가 아니어도 지금 그 사람들이 많은 토론을 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