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방식은 ‘불안(不安, Anxiety, Angst]’이라는 정서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불안은 정해진 대상이 없는 막연한 기분을 나타낸다. 인간 존재방식의 근본은 인간은 죽게 마련인 존재라는 유한성에 기인한다. 불안사상의 선구자인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철학』(1844)에서 인간이 비연속적인 순간으로 움직여가는 단독자(單獨者)로서 자유로운 결단을 할 수 없고 일의 성공과 실패를 자신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방치한다고 말한다. 실존주의자 야스퍼스는 불안을 가리켜 ‘한계상황’이라고 말한다.

불안개념은 정신분석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증상들을 고통스럽고 괴로움을 주는 ‘불안경험을 회피하려는 시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불안은 모체(母體)의 태반(胎盤)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경험하게 되는 심리상태라고 말한다. 안전하고 영원할 것 같던 완벽한 ‘자궁’이라는 환경에서 세상으로 떠밀려 나오는 순간 태아는 최고도의 불안을 경험한다. 눈꺼풀을 통해 들어오는 형광등 불빛은 아프고 정지상태에 있던 폐의 움직임은 울음이라는 언어로 고통을 알린다. 타의에 의해 경험하게 된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인간은 그렇게 불안을 안고 세상과 만난다.

불안은 막연함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생명이라는 기막힌 선물을 거저 받았지만 동시에 죽음도 받았다. 불안은 인간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좀 더 안전한 것, 좀 더 편안한 것, 좀 더 안정된 것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천년이 흐르고 이천년이 흐르고 또 많은 세월이 흘러 과학이 인간의 형체(形體)와 감성(感性)을 모방한 또 다른 인간을 만든다고 해도 생명과 함께 운명적으로 받은 불안을 잠재우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간은 자신들의 엄청난 불안을 잠재워 줄 수 있는 아니 불안을 잠재워 주기를 소망하는 신(神)을 만들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어 낼 수 있는 자! 자신들의 욕심을 마음껏 채워 줄 수 있는 자! 그래서 인간 최고의 불안인 죽음을 넘어 영생(永生)의 방도를 가진 완벽한 신을 만들었다. 삶이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불안해지면 인간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신을 찾았다. 자신의 불안이 해소 되었다고 믿어질 때까지 빌고 또 빈다. 돌에게 물에게 바람에게!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한 함께 생존할 것이다.

불안은 인간을 성숙시킨다. 노력하게 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협동하게 한다. 하나보다는 여럿이 있으면 불안은 감소한다. 함께여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그렇게 인간은 사회 문화 경제 예술을 발전시키면서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고 지금도 그렇게 생존하고 있다. 위로하며 위로 받으며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웠다. 문제는 더불어 살아가면서 불안은 해소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증폭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혼자였으면 그냥 넘어갔을 불안 요소가 함께여서 더욱 커져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시대를 혼란스럽게도 한다.

그것의 가장 작은 모습은 반란이고 가장 큰 모습은 전쟁이다. 개인으로는 일탈이고 크게는 자살이 될 것이다. 자살은 자신의 현실이 불안하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엄마의 자궁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선택하는 가장 큰 충동이라고 해석한다. 지구의 중력처럼 인간은 날마다 순간마다 안정된 곳 안전한 곳을 향해 돌진한다.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인간은 또 하나의 방도를 찾았다. 기도! 그 무엇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힘을 기르는 수단! 즉, 자기최면이다. 스스로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넣고 삶의 유한한 그 무엇들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그래서 진정 죽음조차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平定)의 힘을 길러야만 비로소 불안이라는 막강한 적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의 시대에 당신의 방도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