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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미경(글보리)
    오미경(글보리) 라이프이스트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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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분석가,명리상담가, 글작가로 [남자요리99] [여자마음설명서]가 있고 [여자마음설명서]는 네이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과거 젊은 시절에는 성악가(메조소프라노)로 30년가까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상담문의 010.5561.1644)

  • [오미경 칼럼] 자성(自省)하며 나아가는 삶

    누군가는 세월이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단다. 더 젊었을 때는 이해 못 한 말이 지금은 참으로 그런가 싶다. 뭐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될 것이었다. 남들이 사는 것처럼 나 또한 별것 없는 삶이니 그렇게 남들처럼 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별것 없는 삶에 물음을 던졌다. 아니 던져졌다. 왜? 왜? 왜? 나이 60을 바라보는 지금 시점에서 나는 내 삶에 대해 왜? 라는 질문과 함께 멈췄다. 정지다. 더 나아가지 않았다. 답을 얻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아가져지지 않았다. 그래서 멈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이기에 그렇게 살았고 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의 의지인 것 같지만 나의 의지가 아닌 그 어떤 실체에 의해 사는 것 같은 나, 나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내가 아닌 나, 돌이켜보면 때로는 숨 막히고, 가슴 아프고, 힘겨웠던 삶에서 지금도 그다지 변함없는 것 같은 내 삶의 실체가 궁금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무엇인가에 붙잡혀있는 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못난 모습에 휘둘리고 있는 나, 나는 누구이며 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가? 긴 날을 기도했다. 알려달라고, 알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애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엇엔가에 떠밀리듯 짐을 쌌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일생에 처음이다. 생각나는 한 사람을 만나 맥락 없는 말을 던졌고 그 또한 무작정 길을 안내했다. 무엇이 두렵냐며 무조건 해 보란다. 5시간을 내 달렸다. 그곳이 어디며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있고 또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길을 달렸다. 그냥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2021.07.07 14:36
  • [오미경 칼럼] 맞지 않는 옷, 먹고 살기

    요즘 매일이 먹고사는 이야기로 넘쳐난다. 먹고 살기! 사는 게 뭔지! 푸념도 하루 이틀이다. 며칠 전 가족 같은 동생들을 만나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이 아프고 힘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삶에 대한 숙연함으로 한 동안 머물렀다. 사는 게 뭔지! 늘 말이 없이 엷은 미소로 삶을 관조하며, 자기 속상한 것은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속으로 삭이는 동생, 생각이 깊고 이타심이 강한 보석 같은 동생,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은 이러한 자신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붙잡고 있어서 그 아픔이 극심했을 것을 알기에 동생의 아픔은 내 가슴도 아리게했다. 수년을 알고 지내 온 동생의 성품에서 툭 튀어나온 “점쟁이를 찾아 가 볼까 했어요”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아픔이었다. 구안괘사(얼굴 신경 마비 증상, 입과 눈이 한쪽으로 틀어지는 병)에 중풍 뇌졸중(반신불수) 증상까지 있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병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하니 이 모든 증상의 원인이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초기에는 진급도 잘 되고 이사직까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다 싶더니 마음고생도 그만큼 극심했던 터였다. 누나로서 이 지경까지 된 동생에게 죄스런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말 나온 김에 사주 좀 보자고 했고 펼친 동생의 삶은 ….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그 힘겨운 삶을 성실함과 뚝심으로 버텨왔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속이 상했다. 지금에 와서 이미 경험해버린 아픈 삶을 돌이킬 수 없으니 그저 아타까울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벗고 아직 젊고 힘과 지략이 있으니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 즐겁게 훨훨

    2020.12.01 10:00
  • [오미경 칼럼] '승려'가 '중'이라 불리는 것도 과분하다

    요즘 혜민 승려와 현각 승려와의 공방으로 sns가 시끄럽네요. 가끔 들여다보는 페북에 심심찮게 그들의 이야기가 오르내려서 뭔가 하고 들여다봤더니 참으로 시답잖은 말 장난(?)으로 보여서 피식 웃었습니다. 제가 웃은 이유는 ‘뭐 그렇지’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뭐 그렇지’라고 생각한 대는 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호칭입니다. ‘승려’를 ‘스님’이라고 일괄해서 부르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사실 어떤 ‘직’에 대해서 ‘님’자를 붙이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에 합당하게 행동할때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전에도 “스님은 승려가 자신의 스승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러는 생각이 머리깍고 승복만 입으면 지나개나 다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보니 승려도 못 되는 ‘중’같지도 못한 인간들도 모두 ‘스님’이라 불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중도 못되는 자신을 일컬어 ‘ㅇㅇ스님입니다’라고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것들에 매우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간의 본질과 그 운행과 함께 띠라오는 행실의 어떠함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 제대로 수도하는 자라면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저는 출가 수행자 ㅇㅇ입니다”하고 소개해야 옳습니다. 그가 속칭(속칭라고 하는 이유는 절이 커야할 이유도 없고 큰 절이라는 것 가체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종교에 동일합니다) 큰 절의 주지여도 그

    2020.11.20 10:00
  • [오미경 칼럼] 직업을 선택할때는 명리학의 도움을 받아라

    사주팔자(‘사’는 생년월일시, ‘주’는 기둥 주, ‘팔자’는 네 기둥에 속해 있는 오행(목화토금수)의 음과 양의 수)는 한 사람의 삶의 바탕이 되는 근본요소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응애하고 태어날때 받아드는 생년월일시의 영향을 받으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사주팔자만 잘 연구하여 풀줄 안다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의 모습을 알 수도 있고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과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현재의 삶을 이해하며, 불학실한 미래에 대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에 좀 더 지혜로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삶을 결정하는 많은 요소들 중에서도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을 선택하는 일일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는 반드시 재화를 많이 벌고 못 벌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삶의 의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은 불학실한 미래를 설개하는 일이 가장 난해한 일입니다. 세계정세의 흐름이나 한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의 흐름 혹은 개인의 삶의 철학의 기준으로만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직업군이고 미래를 보장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기와 맞지 않는 일이라면 설령 두뇌가 혹은 상황이 되어 그 길을간다해도 그 자신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 문제를 알고도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너무나 많은 실수를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혹은 내 아이가 어떤 일을 선택해야 싫증내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2020.08.11 12:50
  • 내가 왜 그랬을까?

    최근에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복합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이용하고 있다. 음식이나 커피를 사지 않고 몇 시간이든 그 공간에 있어도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데다가 차로 이동하는 나로서는 주차료가 무료인 것이 가장 큰 혜택이다. 독서용 스탠드를 설치해 둔 책상들도 있고, 많은 가족이나 혼 밥을 하는 사람들도 한끼를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형태의 테이블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편의 시설로는 1층 복합공간에 함께 있는 식당들과 지하에 두 개 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마켓과 8개 층의 지상 주차장이 전부다. 심지어 이곳 마켓에서 판매되는 식품 가격은 코스트코 가격대비 최저가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서 오전에 가면 신선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대기업이 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다른 곳에 비해 이 지역은 집값이 저렴한 편이어서 신혼 부부들이나 혼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이 공간은 주로 가족 단위의 젊은 부부들이 많이 이용한다. 평일에는 더구나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보니 낮에는 애기 엄마들이 삼삼오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미세먼지와 아파트의 층간 소음 스트레스 없이 마음껏 뛰어 놀게 한다. 나도 미팅이 있으면 주로 이곳을 이용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좁고 답답한 실내 보다는 넓고 쾌적한 이곳을 주로 찾는다. 이곳에 있으면 우리나라가 저 출산 국가가 맞나 싶을 만큼 취학 전 아이들이 많다. 다소 버거운 층계를 네발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나, 그 짧은 한 발로 층계를 내려가다가는 영락없이 굴러 떨어질 것이 뻔한 일인데도 그런 위

    2019.04.11 13:01
  • 변화는 쓰나미로 훅 하고 들어온다

    우리사회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야기 하자면 글도 쓰기도 전에 화부터 난다. 솔직히 어디하나 성한대가 없으니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 국민들의 의식이 변하고 주장이 받아 들여져서 일부분은 과거보다 나은 듯 해 보이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는 크지 않다. 아마도 기대치가 높아서 작은 변화는 변화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싶지만 케케묵은 고릿적부터 쌓여온 문제들이 한 순간에 해결 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 이리 단호하게 말하지만 그래도 찜찜한 뭔가가 자꾸만 남는 것은 변화에 대한 미련이다. ‘이혼해!’ 라고 소리 질러도 법원으로 당장 쫓아가지 못하는 처절한 미련 같은 것이 게다. 하지만 빌고 빈 소망이 간절함으로 모이고 모이면 하늘을 움직인다는 선조들의 말씀들을 부여잡고 오늘도 두 손 모아 머리를 숙여 기도해 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게 해 주소서’ 얼마 전에는 프랜차이즈 사업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광화문 앞마당에 모였다. 하나님 위에 건물주, 건물주 위에 가맹점주가 있다는 현실에 대한 한탄이며, 경기 악화와 최저임금 상향조정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택시 기사들이 카카오의 횡포에 반기를 들며 머리에 띠를 하고 주먹 쥔 손을 뻗어 하늘을 찔러댔다. 밥그릇 싸움이 치열하다. 이 모든 것들은 광화문 앞마당의 비애다. 임금의 큰 덕(德)이 자신들에게 비추어 소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갖가지 불꽃으로 타오른다. 승자와 패자가 모두 공존 하는 곳, 때로는 고통으로 부르짖고, 때로는 환희로 노래하는 경복궁 앞마당은 그런 곳이다. 그들의 뜻은 온전히 임금을 향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

    2018.12.28 22:15
  • 약속한 한 해가 또 가고

    반백년 넘어 살다보니 한 해 한 해에 대한 평도 조금은 가능해 지는 것 같다. 어떤 해는 그저 그렇게 별 일 없이 지나가기도 했고, 또 어떤 해는 죽나 싶을 만큼 힘든 일들로 인해 어찌 살았는지 또 살고 있는지 누가 물을까 피해 다닌 해도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자신만의 시간에 매몰되어 세상의 세월이야 거꾸로 가든 날아가든 내 알바 아니었던 해들도 있었고, 그저 늘 오늘만 같기를 소망한 해도 있었다. 인간의 삶을 무엇이라 정의 할 수 없듯이 한 해 살이 또한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일 듯, 그렇게 보내고 또 맞으며 우리는 약속한 해를 산다. 마음이야 늘 행복하기를 소망하지만 소망이 삶이 되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러기에 기원하고 또 빌고 빌어 그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행복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소원성취하세요.’ 과거 사상가들이 무한한 우주의 운행을 해와 달로 쪼개고 날과 시로 쪼개지만 않았다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음에 불안 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지금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사 나고 살고 죽는 것에 계획이 좀 없으면 어떻고 예측이 불가 하면 어떤가. 예측한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계획을 세운들 그 계획의 몇%를 성취하며 산다고. 짜임세가 좀 덜하면 어떻고 불안정한 틀을 만들어 끼워 넣는 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란 말인가? 인간이 자신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많은 장치들을 개발하여 그것을 ‘과학’이라 으스대며 ‘발전’이라 부축이고 ‘성장’이라며 죽기 살기로 매달려 혼신을 다해 일해 왔다. 결과는 아직 미정이며 그것들의 부작용들로 인해 예상치 못한 것들로 인간이 죽어 가고 있다. 지금 혹은 서서히 그렇게. ‘인간

    2018.12.26 12:53
  • 우리는 자주 눈을 감아야

    세월을 살다 보면 삶이 반복됨을 세삼 느낄 때가 있다. 마치 나는 절대로 그런 시절을 살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떡 하니 눈앞에 서 있어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한 번씩은 해 봤을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의 생각은 자주 세월과 나이를 들먹이며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분주해 진다. 말 나온 김에 과거의 삶을 따져보면 나 또한 자손을 안고도 남을 나이를 살고 있지만, 또한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시듯 생각은 아직 청춘에 머물러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생각은 생각일 뿐 자식들은 쑥쑥 자라 자기 짝들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시집 장가보내는 일이 남 일이 아니게 다가온다. 내 나이 18살 즈음, 어느 가을날, 하교 길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가 젊은 남녀가 다정히 가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저 여자는 얼마나 많이 배우고 예쁘고 훌륭하기에 남자가 선택했을까?’ 다정히 걷는 젊은 남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나는 줄 곳 그들을 바라보며 되뇌었다. ‘나를 선택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얼마나 공부하고 또 얼마나 훌륭해야 할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머리를 숙이고 걷던 그때 그 일이 지금도 잊혀 지질 않는다. 얼마 전에 아는 아이가 장가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참으로 찹찹했었다. 그 아이의 성장을 모두 보아 온 터라 할 수만 있다면 혼인을 말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생각이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장가를 간다는 그 아이, 어린 시절 그가 어떤 행동을 했으며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양육을 받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나는 장가를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2018.09.25 05:00
  • 안희정 1심 선고 무죄 판단에 대한 견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시비에 휘말릴 때가 있다. 사실 처음 시비의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상대가 자신에게 행한 언행인데, 그가 자신에게 막말을 했다거나, 비난을 했다거나, 거짓을 말했다거나, 무시하는 언행을 했다거나 등이다. 그래서 시비를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비가 붙은 그 처음 상황에서의 시발이 되는 그것! 에 주목하면 해결은 쉬워진다. 문제가 된 언행에 대해 사과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면 갈등은 오히려 쉽게 해소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타이밍이다. 문제요인이 발생했을 때를 기점으로 최대한 빠른 시간에 그 문제 언행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그 언행은 잘 못 되었다. 생각이 부족했다. 상처 받지 마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그 문제는 100%는 아니더라도 90%이상은 해소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속하고 구체적으로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10%의 불편함은 남는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언행을 했을까? 내가 정말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하찮은 인간인가?’ 라는 생각들로 시작해서 그 언행을 한 사람의 외모, 능력, 추산되는 재산정도, 지위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자존감 정도에 따라 상대에게서 비난할 거리를 찾거나, 혹은 자신을 향한 비하거리를 찾는다. 물론 대부분의 갈등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미 갈등이 시작된 사람이라면 그러한 생각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어 처음 상황의 단순성을 넘어 복수의 감정으로까지 스스로를 몰아갈 확률이 높아진다. 인간은 생각하

    2018.08.15 13:05
  • 묵은 찬이 갖는 내공처럼

    한진그룹의 명도 다했나보다. 딸들에 이어 부모들까지 그들의 추악한 인간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최순실을 경험하면서 못된 강남 아줌마들이 연일 도마에 오르더니 못된 그룹 일가가 도마에 오른다. 그룹 일가의 횡포들이야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추악암이 드러나는 양상과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나는 미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근본 욕구인 성문화의 추악한 단면이 드러날때 이제는 더이상 망설이며 드러내지 못 할 것은 없겠다 짐작했다. 사실 인간의 성행위 만큼 민감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의 일탈과 관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속을 몽땅 뒤집어 보이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 무겁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그래서 더 비밀스러웠던 지극히 사적인 일들에 대한 아픔이 사회적 인식으로 공인되고, 수용되고, 더불어 공감과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대 변혁이다. 이렇게 미투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인식의 대 변환은 여태껏 약자로 가슴 앓이만 하던 수많은 암흑사들을 하나 둘 들추어 내는 것에 용기 백배의 힘이 되어 주고 있다. 마치 해일이 바다밑까지 뒤집어 생물들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건강한 삶을 이어가듯이, 과거에는 누구도 입밖에 꺼내지 못했던 뿌리 깊은 사회악들이 더는 덮히거나 묵인되지 못하고 수면위로 떠올라 묵은 상처들에 다시 생체기를 내지만, 기꺼이 참아내며 오랜 울분들을 뱉어낸다. 촛불로 세운 정권이 주는 힘이다. 이 용기는 오래 묵어 곰삭은 찬거리들이 갖는 내공과 같이, 쉽게 사그라지거나 섲불리 나불거리는 순간적이거나 가벼운 그것이 아니다. 오래도록

    2018.04.23 13:03
  • 변화만이 살길이다

    날씨가 좋으면 미세먼지가 기승, 날씨가 우중충하고 스산하면 대기 질이 좋다니 아. 어쩌란 말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서울시장 후보 중에 대기 질을 개선 시킬 확실한 방안이 있는 사람은 당선자가 될 지경이다. 살다가 살다가 이런 일로 고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중국이 우리랑 붙어 지낸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예전에 없던 일이 지금에 와서 왜 이리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지 분명 그동안 뭔가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중국 요인으로 지목되는 사막화의 급증, 공장의 외곽이전 설립 집중, 국내 요인으로 지목되는 자동차 수요량 급증으로 인한 배기가스 배출 증가 등으로 인한 얇아진 오존층까지. 재력가들이 NASA가 밝힌 우주 호텔에 주목하듯 정말이지 이제는 지구를 떠야 살아야 하는 시점이 된 건 아닌가 싶을 만큼 고민이 깊어진다. 가임기 여성들은 육아비용이 부담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기도 하지만 심각한 대기 질 때문에도 아이를 낳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 공기 때문에 삶을 고민하고 살았던가? 과학의 발전이 낳은 병폐다. 편하고,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과학은 비로소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좀 더디고, 좀 불편하고, 좀 아쉬운 것에서 오는 유용한 것들과의 이별이 가져다준 벌이다. 하지만 이미 좋은 것을 맛본 인간에게 퇴보나 회기는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당장 쓰러져 죽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예견된 결과를 보더라도 더욱 그렇다. 답은 하나다. 발생 원인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다.

    2018.04.15 17:06
  •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팩트

    ‘세월호 7시간의 진실’에 대한 의문은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도대체 그 골든타임에 대통령은 뭘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었다. 성형시술 중이었을 것이다. 시술 후 마취가 덜 풀려서 자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모를 부정행위들에 대한 추측은 일파만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고 대통령에 대한 불신은 하늘을 찔렀었다. 신뢰할 만한 어떠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 혹은 못 하는 박근혜 측근들에 대한 원망은 그녀를 대통령이라 부르고 싶지 않을 만큼 참담했다. 무엇이 진실일까?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유가족은 물론 국민도 그 진실을 알아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의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 물음은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최소한의 알 권리였고 갑자기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당연한 의문이었다. “알고나 보냅시다. 왜 죽었는지. 내 아이가, 내 가족이 왜 죽어야 했는지” ‘세월호 7시간의 사건’에서 드러난 진실은 박근혜에게 대통령의 자리는 처음부터 백성 위에 군림하는 독선적 군주의 자리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적이었다. 자신이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라는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공무원이라고 생각했다면 출근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근무시간에 성형시술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단 공무원들은 과중한 업무로 인해 과로사로 죽어 나가는 현실에서 대통령이라는 가장 큰 책무를 담당하는 고위 공무원은 할 일이 없어 근무시간에 늦잠을 잔다?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문고리 3인방(안봉근, 이재만, 정호성)은 알고 있었다. 사고에 있어서 골든

    2018.03.29 15:42
  • 아담의 갈비뼈 두 개로 여자를 만들었다?

    기독교가 이러한 논리를 펴면서부터 여자는 더욱 설 곳이 없어졌다. 여자는 끽해야 남자의 갈비뼈 두 개? 여성비하의식은 기독교가 최악이다. 성서의 그 어느 곳에도 무리의 수를 헤아림에 있어 여자는 없다. 아이도 사람으로 취급되지 못했다. 왜? 누가? 무슨 권리로? 남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여자를 만든 남자들의 하나님이? 기껏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그 하나님조차도 여자와 어린 아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신이 목적하는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왜?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는 여자들은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 논리에 맞지 않는 이론으로도 인류가 이 만큼이라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자들의 너그러운 아량 덕이라는 사실을 남자들은 알까? 초기 인류는 결코 기독교식의 구분 짓기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들은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만큼은 순수하고 맑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일을 했고 그저 그렇게 함께 살았을 것이다. 기독교가 남자와 여자를 갈라놓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종교철학자들이 가증스럽게도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기준을 정하고, 가치를 매기고,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저 함께 둥글둥글 사는 것이 삶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히려 초기 인류는 여자를 두려워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그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 내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여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 아니 더 우월한 존재라 여겨 ‘대모신’을 만들어 추앙한 문헌과 조각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언제부터 남자가 이리 오만해지고 교만해졌는가? 그 시점을 생각해 봐야한다. 남자! 그들이 만든 세상! 과연

    2018.03.06 00:02
  • 새로움은 인식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2018년도,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정한 날들을 하나, 둘 세면서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결의를 다잡으며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새로움! 새로운 것이란 있는가? 2천여 년 전 성서 철학자들은 이미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규명했다. ‘이미 오래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듯이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다고 했다. 그저 망각만이 지금의 그것이 새로움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새것을 이야기한다. 새해, 새날,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 무수히 많은 ‘새로운’이라는 명제를 거론하며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함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기를 주문한다. 새로움! 그 새로움은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새로움인가? 환경의 변화, 조건의 변화, 체계의 변화, 규정들의 변화만 새로움일까? 오히려 이러한 것들로의 새로움의 가치를 세우는 일은 쉽다. 실상은 그 또한 과거로의 반복이겠지만 그렇다. 종교에서는 특정 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남’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와 현재의 삶에서 지금부터 미래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를 주문한다. 그것은 삶의 방식, 가치의 전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대대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억울하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했던 과거 사건들을 들추어내어 지금 시점에서 낱낱이 살피고 재정립하겠다고 천명했고 2018년 1월 14일 드디어 ‘권력기관개혁방안’을 발표했다. 청와대는 이날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과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시위, 평택 쌍용자동차 농성, 용산 화재

    2018.01.16 10:48
  • 작은 변화는 큰 변화의 전조

    천재지변인지 인재가 불러온 참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진이라는 현상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불가한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하루빨리 흔들림 현상이 안정되고 이재민들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모든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정부가 마음을 일으켜 이렇게라도 개인의 사생활을 배려해준 것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재인 정부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지난 정부에서의 세월호 가족들은 3년여 동안이나 이 작은 배려조차도 받지 못했고 마치 옷을 모두 벗고 광야에 나가 앉아 있는 듯한 불편함과 수모를 겪어야 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개인이 나라를 이루고 살면서 함께 십시일반 사비를 털어 세금을 내는 이유도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이러저러한 문제들에 대해 그 고통을 적절히 나누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정부들을 경험했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고 그것이 정부 역할의 한계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해도 강요당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잃고 살아온 과거 우리 조상들의 뼈아픈 한이 대물림되어 작금의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너무 빨리 배워버린 탓일 것이다.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다소 모호한 슬로건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나라다운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첫술에 배부른 일은 없다. 먹고 또 먹다 보면 배는 불러 질 것이다.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말이 현실이 되어 더 많은 과도한 요구들을 끊임없이 하는 마치 만족을 모르는 배부른 돼지처럼 될까 앞선 우려도 되지만 걱정을 앞당길 필요는

    2017.11.29 10:54
  • 존재와 죽음의 기술

    < 존재와 죽음의 기술> 인간의 탄생은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다. 그것이 운명이든 필연이든 누구도 자기 삶의 환경을 선택하지 못한다. 외부적 환경도 내면적 환경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다. 그 주어진 환경을 살아 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이 근본적 물음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졌으니 사는 것으로 알고 살았고 또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부모도 어린 자식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울면 젖 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안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놀아주고 그렇게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만으로 부모의 역할이 다 된 줄 알고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맞닥뜨려지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 한 채 나이를 먹는다. 한 살, 두 살…10살… 또 그렇게. 말을 알아들으면서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라면서 접하게 되는 규범들을 익히는 대에 점점 최적화되어 간다. 크고 작은 사회집단들에 들어가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들을 잘 지키도록 훈련되면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놓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할 겨를 없이 40이 되고 50이 되고 또 70이 되어 버린다. 이제는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어색하고 낯설다.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어리석다. 자신이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살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불편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근근이 알려주는 것으로 최선이라 생각한다.

    2017.11.27 17:23
  • 특별한 경험, 이데아

    < 특별한 경험, 이데아> 여타 동물과는 달리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큰 특성은 생각하는 그것도 아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아주 깊이. 그런데 그 깊이가 많은 부분 한 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깊이라는 것이 갖는 또 하나의 맹점이다. 한 우물 파기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편한 인식이다. 뭐라도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매진해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차원으로 넘어 온다면 한 우물 파기는 상당부분 위험성을 갖는다. 인간의 인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인식으로 인해 파생되는 경험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이념이 그렇다. 철학적 방식으로의 설명을 빌리면 이념은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얻어지는 최고 개념으로 플라톤에게서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를 뜻하고, 근세의 데카르트나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내용, 곧 관념을 뜻하며, 독일의 관념론 특히 칸트 철학에서는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이데아 또는 순수 이성의 개념을 뜻한다. 이데아나 이성 개념이 여기에 포함이다. 말이 좀 어렵지만 철학적 사조(한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인식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소 종교적이며 신적인 해석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존재자의 원형’, ‘영원불변한 실재’ 들과 같은 이데아적 해석들이 그러하다. 이데아(idea)는 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하는 말이다.

    2017.11.12 15:46
  • 다 주고 더 주는 것이 서비스다

    < 다 주고 더 주는 것이 서비스다> 우리나라에 서비스 문화가 들어 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는 서비스고 뭐고 그저 먹을 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돈이 있어 그나마 조금 더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서 만연되어 버린 일상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서비스! 이제 우리는 그저 먹는 것 좀 더 나은 것을 갖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존중받는 삶이다. 인간의 궁극적 삶의 가치가 자아실현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임으로써 타인으로 하여금 존중을 받고자 하는 심리의 발현이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활용할 의도로 만들어 낸 것이 ‘서비스’라는 단어다. 서비스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기분이 좋아 진다. 받고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인간심리는 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적극 활용될 가치는 충분하며 욕구를 극대화하고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는 절대적이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소외 시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은 분명히 악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가 자주 ‘저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이용하고 있는 김밥전문점이 있다. 이런 음식점에 이제는 대부분 당연하듯이 붙여놓은 “물은 셀프” 라는 문구다. 10여 년 전에 이 문구는 많이도 낯설었지만 이제는 으레 당연한 인식이 되어 누구도 이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네 스스로 물을 가져다 먹는 대신 우리도 인건비 절감 비용만큼 음식비용을 줄여주겠다

    2017.09.29 01:16
  •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이 어찌 만든 나라며 어떻게 쟁취한 민주주의인데 이런 하찮은 여자가 감히 꼭두각시를 내세워 제멋대로 이 나라를 쥐락펴락 했단 말이야? 4년 동안 말도 안 되는 불행과 불편함들에 이 여자가 있었단 말이야? 그동안 박씨는 뭐했어? 이들의 농간에 놀아난 나는 뭐지? 우리는?’ 지난겨울 1천 5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나라가 이렇게 썩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의 무게 때문에 방치했다는 죄책감과 현실의 처참함으로 인해 살을 애듯 추운 거리로 나섰다. 시간이 갈수록 밝혀지는 최씨를 둘러싼 내용들은 엄청난 수치와 굴욕이었다. 참으로 암담한 심정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시민들은 일과에 지치고 삶에 지치고 가치에 지쳐서 참으로 힘든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맞이한 문재인 정부출범 19일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시민들의 기대는 높다. 지난겨울 시민들은 시민의 의미와 국가의 의미를 깊이 새겼고 다시는 이런 굴욕은 경험하지 않겠다 결의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의 인선을 보고 있다. 잘 한다 칭찬일색이며 수치스러웠던 지난 세월을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워 한다. 주변에서도 모두 잘하고 있다며 기막힌 인선이라고 말하고 나 또한 당파를 초월한 새로워진 인선에 대해 감격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늘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나의 지켜봄은 ‘잘하나 어디보자’가 아니다. 그런 태도는 비난과 판단을 전재로 한 부정적 의미라면 나의 ‘지켜봄’은 부딪히는 난관들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며 거기에 나의 몫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2017.05.28 13:02
  •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문 분석-최순실게이트

    정말 실망스럽다.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믿고 국민으로 있었다는 것이 정말 치욕스럽다. 대통령의 지지가 5% 대로 하락하고 국민의 5%를 제외한 모든 국민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상황에서 나온 사과문이라고 믿기에는 귀가 의심스럽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대국민담화라고 들고 나왔다. 거기에 더해 신세 한탄까지! 작금의 담화문 내용은 구체성은 없고 감성에만 호소하는 무식한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에서나 있을 법한 내용 수준이다. 물론 아줌마 전부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진정 국민을 우롱하는가! 국민이 어디까지 가기를 바라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대통령은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인식은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그 자체다. 인식이 불분명하면 행동도 불분명하게 된다. 이번 대국민담화문은 그야말로 ‘담화’로 대통령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과문이기를 바란 국민의 잘못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담화문의 내용은 사과문의 흉내를 냈지만 그것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변명문, 핑계문, 남탓문이었다. 사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사과문을 쓰는 요령이라도 물어보고 쓰는 성의는 보여야 했다. 정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괴감이 심하게 든다. 우리가 대인 관계를 하다보면 사과할 일이 자주 생긴다. 그런 사과를 무시하고 대충 얼버무리면 관계는 오해를 낳고 결국 단절을 가져온다. 살면서 실수로 혹은 고의로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도나 생각에 반한다면 바로 사과해야

    2016.11.04 15:56
  • 변화는 지금 나부터

    세상이 병들어 가고 있다. 옳지 않음이 옳음으로 대체된 순간부터다. 비리가 관행이 되고 비논리가 인정받고 악행에 무뎌지는 것들이다. 비난과 조롱, 가식과 아첨, 변명과 비겁한 타협은 세상이 병들도록 만드는 양념들이다.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가운데 타인을 판단한다는 것은 정신병자가 또 다른 정신병자를 두고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식이 넘쳐나는 한 세상은 옳은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없다. 비난이 아닌 격려로 판단이 아닌 객관적인 비판으로 아첨이 아닌 아픈 지적으로 타협이 아닌 협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 일은 그 누구도 아닌 지금 나 자신부터다. 자신의 이기만을 생각한다면 서로가 살아갈 방법은 없다. 개인주의는 자기 발전을 위한다는 전제에서 필요하지만 집단을 파괴하지 않는 선을 지켜야 한다. 정치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정체성을 올바른 형태로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필요악이다. 인간이 사유를 해야 하는 이유는 옳은 인간 바람직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 옳은 인간 바람직한 인간이란 사리를 분별하여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아 행동하는 인간이다. 행위 하지 않으면 죽은 사유다. 어떤 형태로든 사유함은 행동함이 전제 되어야 한다. 자기 속에 갇혀 옳고 그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향해 사회와 국가를 향해 바른 소리를 낼 수 없다면 그 사유는 잡념이며 푸념에 그칠 것이다. 인간이 교육을 받는 이유는 식견을 넓히기 위함에 있다. 현대는 참된 교사가 없고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학생이 없다.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알면서도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닫기 때문이다. 국가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사회가

    2016.10.18 14:12
  •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사드는 방어체계다. 공격할 의도가 없다면 방어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다. 마치 태권도장에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방어기법을 배운다고 해서 그 누가 그것에 대해 불편을 제기하기 않는 것과 같다. 문제가 된다면 미사일 방어 대상국이 자신들의 군사장비에 대해 탐지당하고 있다는 것이 기분 나쁜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탐지로만 본다면야 이미 수만 개의 인공위성이 우주 곳곳에서 지구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세상에 살면서 그것이 그렇게 특별한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정말 궁금한 것은 미국의 속내다. 그들 말대로 한반도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당국인 한국의 요청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거의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주도하에 설치비와 장비비를 모두 자비로 해서 배치하겠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발언이다.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일은 한국보다는 미국에 더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들이 마음이 정말 착해서 순전히 우리나라를 위해 그 엄청난 돈을 지불할 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사드배치를 승낙하고 무엇을 얻기로 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아니면 혹시 한국 정부가 국민들을 속이고 돈을 주고 들여오는 것일까?라는 음모론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왜? 또 하나, 이렇게 생뚱맞게 생긴 요상한 물건이 대한민국 그것도 성주라는 특정 지역으로 정해 질 때까지 정부는 국민에게 알릴 의무를 다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주에서 벌어지는 황교안 국무총리에 대한 격한 분노의 표현이나 뒤 이은 군민들의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불편한 속내를 보이는 것을 보면 정부의 경솔한 정치

    2016.07.19 09:37
  • 희망은 있는가!

    ‘인식’이라는 명사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일반적 의미로는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이라고 되어 있고 심리적 의미로는 “인지, 즉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과정”이라고 되어 있다. 또 철학적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물에 대해여 가지는 그것이 진(眞)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개념, 또는 그것을 얻는 과정”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인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간은 사색을 하고 학문을 하고 탐구를 한다. 인식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안다는 것에서 나아가 그 사물의 옳고 그름에 따라 실천하는 것까지를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라고 말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나 혼란스럽다. 인간에게 과연 인식이라는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은 부정의 또 다른 부정을 낳는다. 그나마 믿고 있던 장치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그 실체는 경악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우리들의 아픈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전 사건들까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로도 너무나 차고 넘치니 그렇다. 연일 터지는 조현병이 의심된다는 묻지 마 살인 사건들, 평택 계모의 원영이 살인 사건, 서울대생 단톡방 성희롱 사건, 존속살인과 청부살인에서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발언에 이어 홍준표 지사의 쓰레기 개 발언까지. 연예인들의 성매매 정도는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묵인되어 버릴 만큼 우리 사회는 너무나 큰 혼란에 빠져 있다. 가치관의 혼란!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력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 남아 그 속에 매몰

    2016.07.14 01:59
  •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가!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삶을 경멸하고 죄악시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일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동성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별해 보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런 친구들은 일시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하지만 대부분 이성애자로 돌아온다. 프로이드는 동성애가 부모의 양육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했지만 이 주장은 과학이 발달하기 전 특별한 과학적 근거 없이 심리적 현상만을 갖고 만든 이론이다. 최근에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성소수자의 형질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태아 때 결정된다. 태아의 원판은 여성이다. 남자가 젖꼭지 같은 여성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극심한 기아를 경험한 전쟁 때는 남자의 젖꼭지에서도 젖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수태 후 6~8주가 지나면 남자태아 XY는 안드로겐이라는 다량의 남성 호르몬을 공급받는다. 안드로겐의 첫 번째 역할은 고환을 형성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여성적 두뇌를 남성적 두뇌로 바꾸는 데 작용한다. 만약 남자 태아가 적절한 시점에 충분한 남성 호르몬을 공급받지 못하면 게이가 되거나 양성이 된다는 이론이다. 식물에서도 동물에서도 양성의 특질을 보이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그런 특징을 갖는 수가 많지 않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특정 성에 대한 특징이 두드러지는 때는 호르몬 분비가 활발해 지는 사춘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는 잘 모르고 있던 성적 성향이 사춘기에 두드러지면서 자신도 몰랐던 특성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상담을 했던 청소년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개신

    2016.06.14 13:46
  • 4.16(세월호 참사)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4년 그날 나는 사무실 문도 걸어 잠그고 3일 밤낮을 슬픔에 잠겨 울고 또 울었다. 내재되어 있던 우울감이 올라와 그 슬픔은 나를 패닉 상태에 빠뜨렸고 그렇게 그냥 있었다. 하늘도 울었고 땅도 울었고 사람도 울었다. 욕심 없는 자만 그랬다. 오늘이 또 그렇게 그날이다. 자식은 죽어 부모의 가슴에 묻힌다고 했다. 자식이 죽던 그날 그렇게 함께 죽었다. 그들은. 그들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날 그 슬픔을 거기에 그렇게 둔 채 아직 거두지 못했다. 왜? 왜 그럴까? 혹자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한다. 지겹다. 그만 하면 됐다. 그래서 뭐가 바뀌었냐? 받을 것이 더 있느냐? 심지어는 여행가다가 죽었는데 뭐가 그리 서러우냐? 반문한다. 또 다른 혹자는 자기 자식이 탈 배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런 배에 실어 보낸 부모들이 자식을 죽였다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자식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죽었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고 아직도 그 바다에 9구의 시신이 그냥 그렇게 배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히 사람이 더구나 아이들이 죽은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 그것도 한꺼번에 수백 명이 죽었다는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도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날 짐승 들짐승 바다의 물고기도 울고 또 울 엄청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분(公憤)하는 이유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정치권들, 기득권들,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에 의해 힘없고 아무런 잘못 없는 어린 아이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에 있다. 최선을 다했지만 희생이

    2016.04.18 14:56
  • 당연한 것들에 대한 반문

    당연한 것들에 대한 반문(反問) 우리의 관념들 중에 너무나 당연해서 두 번 거론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많은 부분이 유교적 교육에 기반 하는 것이고 다른 많은 것들은 대부분이 같은 상황을 통해 얻은 일종의 경험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당연하지. 그건 그래!’ 라고 인식되는 범주 안에 있다. 예의로 센스로 때로는 지혜로움으로 칭송받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런 범주(範疇)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런 범주 속에 있는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구별 짓는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바넘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그것은 일종의 교양으로 예의로 도덕으로 통념으로 공기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에 녹아 있다. 그것을 소멸 시키거나 분리하려는 시도는 불안을 가져오고 무엇인가 많이 잘 못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지금 우리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잘 보존 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남아 있게 한다. 개인이 갖는 ‘그 어떤 가치’가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한다. 그런 가치가 맞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싶어 하고 뭔가를 함께 도모하고 싶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주는 당연성에는 오류가 있다. ‘당연한 것들’의 범주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고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왜?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에 대해 반박하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들에 대한 되물음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현대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에 빠져있다. 현대인의 우울은 심각한 문제다”라는 문제의식에 대한 ‘반문’ 같은 거다. 문제는 현대인이 우울감에 빠져 있는 것

    2016.01.16 14:28
  • <페르소나 Persona의 진실>

    페르소나 Persona의 진실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했다.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집단 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을 잘 포장하느냐가 성공의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뛰어난 처세술, 교묘한 눈속임, 시시때때로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위선을 사회는 묵인한다. 그것이 ‘통념’이라고 일반화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진질을 진실이라 분별하면 집단에서는 불편함의 대상이 된다. 너무나 잘 훈련되어서 페르소나가 자아가 되어 버린 사람, 순수하고 깨끗한 그래서 다소 어리석고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이 성공한 사회인으로 대우 받는다.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행동이 화려한 문양의 교양(敎養)이라는 포장지로 둘러 싸여서 어지간한 식견(識見)으로는 본심(本心)을 알지 못하게 교란시키는 그런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유명하다고 하면 막연한 부러움을 갖고 처음부터 그를 평균이상으로 인정하고 바라본다. 그 사람이 여자라면 더더욱 남자들은 정신을 못 차린다. 예쁜 얼굴에 품위 있는 말솜씨와 교태스러운 자태는 남자들이 사귀고 싶어 하는 여자 1순위다. 그런 여자를 두고 남자들은 교양 있고 인품(人品) 있다고 평(評)한다. 여자들은 특히 페르소나에 강

    2015.11.18 11:23
  • 부부의 동상이몽(同床異夢)

    많은 연인들이 부부의 연을 맺고 또 많은 부부가 이혼한다. 사랑한다고 같이 있자고 영원히 보며 살자고 맺은 언약에 무엇이 문제인가! 남자는 여자를 아내로 맞을 때 자신의 자식을 잘 키워줄 수 있는 여자를 선택한다. 여자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을 때 오직 자신만 사랑해 줄 남자를 선택한다.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피차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그리 하겠다 수용하는 것은 아닐까? 남자는 여자가 그저 아내로 있어주기를 바란다. 살림 잘하고 아이 잘 키우고 시부모에게 잘 대하고 내조에 게으르지 않는 아내이기를 바란다. 거기에 여자가 바라는 여자는 없다. 아내가 여자이기를 요구하면 남자는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편의 사랑이 확인되면 무엇이든 한다. 살림도 아이도 시부모도 내조도 모두 여자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잘 해 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남편의 사회적 지위나 부(富)나 명성은 옵션이다. 남자는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일을 선택한다. 일을 통해 벌어 오는 재화는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원천이 되며 남자의 자존감을 극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족스러운 지경에 이르면 당연히 아내도 자신만큼 행복해 할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사랑의 표현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남편의 세심한 배려, 부드러운 위로, 따뜻한 다독임이야 말로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이다. 재화가 좀 부족하더라도 지위나 명성이 없다고 해도 사랑받고 있다고 느껴지면 모든 것을 감수해 낼 수 있다. 이렇게 부부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을 철저히 실행하는 한 갈등은 필수다. 현명한 부부는 각자의

    2015.11.03 14:36
  • 실수와 실언에 숨겨진 진실

    나는 자주 ‘가족’을 주제로 한 칼럼을 게재한다. 가족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가족이어서, 가족이니까’라는 생각이 언제나 가족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밖으로 확산된다. 소위‘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는 무엇을 해도 이해 될 거라는 착각 때문에 갈등에 빠진다. 이 또한 가족의 또 다른 부정적 관념이다. 오래된 모임이나 수십 년 된 집단을 들여다보면 서로 잘 이해되기 보다는 더 잦은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문제는 예의(禮意)다. 가족이어서 잘 아는 사이어서 오래 된 관계여서 쉽게 간과하는 예의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핵심요소다. 뭐 그 정도는 이해하겠지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그 사람이 알겠지 잘 아니까 바른 소리를 해야겠다는 식의 생각들은 그 속에 예의가 없다면 ‘조언’라는 탈을 쓴 폭력이 된다. 때로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해 줘야 하는 것도 있다. 가족은 더욱 그렇다. 그름을 수정하게 해야 하는 지적이라면 특별히 유념해서 사랑을 담은 표현이어야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엄마니까 아빠니까 라는 생각만으로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 선배니까 대표니까 동생이니까 라는 생각으로 내 뱉은 조언은 그 생각부터 독선(獨善)이다. 그가 무엇이든 어떤 의미이든 상대를 대함에 있어 예의를 저버리는 표현은 욕이다. 정말 그 사람을 잘 안다면 그를 마음으로 배려하고 보듬고 덮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할 예의다. 가정에서

    2015.10.09 21:10
  • 여성들의 명절

      해마다 변함없이 명절은 찾아오고 해마다 변함없이 문제는 발생한다. 여성들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오히려 남자들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페미니스트들의 쾌거인가 남성들의 나태함 때문인가 분간이 쉽지 않다. 1960년 후반 미국 B. 프리단 등의 주장으로 여성해방운동이 시작되어 5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주로 가정경제의 곤란으로 인한) 외에는 아직 그 영향력이 많이 미흡하다. 가족 중 의식결정권자(부모, 남편, 아내)마다 갖고 있는 특성과 특질 때문이기도 하다. 조상을 모셔야 하고 가족 내 엄(嚴)을 세워야 한다는 고전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여성들의 해방은 기대하기 어렵다. 유교적 사고방식은 우리 민족의 얼의 근간이다. 그러난 이제는 그것이 많은 부분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했고 여성들의 마음에 무게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문이 속칭 명문가이거나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고 한다면 어깨가 우쭐해지고 그렇지 않다면 괜스레 위축되고 외면하고 뭔지 모를 헛헛함에 기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1875~1961] 은 인류가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경험을 통해 저장해 온 모든 잠재적 기억흔적(記憶痕迹)]을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 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고 정의 한다. 이렇게 형성된 의식들은 시대가 바뀌고 주장이 달라져도 쉽게 갈아치울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개인의 의식은 교육과 요구 욕구에 의해 변화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사고방식이 의식의 상위가치라고

    2015.09.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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