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한 경험, 이데아>

여타 동물과는 달리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큰 특성은 생각하는 그것도 아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아주 깊이. 그런데 그 깊이가 많은 부분 한 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깊이라는 것이 갖는 또 하나의 맹점이다. 한 우물 파기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편한 인식이다. 뭐라도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매진해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차원으로 넘어 온다면 한 우물 파기는 상당부분 위험성을 갖는다. 인간의 인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인식으로 인해 파생되는 경험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이념이 그렇다. 철학적 방식으로의 설명을 빌리면 이념은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얻어지는 최고 개념으로 플라톤에게서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를 뜻하고, 근세의 데카르트나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내용, 곧 관념을 뜻하며, 독일의 관념론 특히 칸트 철학에서는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이데아 또는 순수 이성의 개념을 뜻한다. 이데아나 이성 개념이 여기에 포함이다. 말이 좀 어렵지만 철학적 사조(한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인식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소 종교적이며 신적인 해석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존재자의 원형’, ‘영원불변한 실재’ 들과 같은 이데아적 해석들이 그러하다.

이데아(idea)는 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하는 말이다. 근대에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곧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데아(idea)는‘보다, 알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데인(idein)’에서 비롯된 말로, 원래는 ‘보이는 것’, 곧 형태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마찬가지로 ‘보다’라는 뜻의 동사 ‘에이도(eido)’에서 비롯된 ‘에이도스(eidos)’와 이데아의 의미를 구분해서 사용했다. 둘 다 ‘형태’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에이도스가 구체적으로 현상되고 감각되는 사물의 형상(形象)을 가리키는 데 비해서 이데아는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통찰되는 사물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를 가리킨다. 곧 이데아는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한다.

이데아를 철학에 처음 끌어들인 사람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原形)이라고 보았으며, 구체적인 현실의 사물은 단지 이데아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일시적인 속성을 지니지만, 이데아는 불변하며 항구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정한 철학자는 가시적인 사물의 세계가 아닌 사물의 본성과 원형에 대한 인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정신, 곧 ‘지(知)’를 통해서만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정신이 이데아를 발견하는 방식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상기(anamnesis)이다. 그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기 전에 이미 이데아들과 친숙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에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사물과의 감각적인 접촉을 통해서 망각되었던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변증(辨證)이다. 인간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사물들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고, 사물의 본질을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랑(eros)이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사랑은 그와 유사한 모든 형상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고, 나아가 외형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곧 지(知)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인식을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단계적으로 이끌며, 무지를 일깨우는 일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감각적 사물들로 구성된 가시적인 세계와 별도로 정신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계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데아야말로 궁극적인 참된 실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데아론은 물질적 요소를 중심으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였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 가치 중심의 형이상학적 철학의 전통을 낳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플라톤은 비물질적이며 항구적인 속성을 지니는 이데아가 참된 실재라고 주장함으로써 물질적 세계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과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근대에 와서는 이데아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곧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경험적 현실세계와 실증적 연구방법을 중시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점차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는 경향이 커졌다. 이는 ‘이데아의 학문(idea + logy)’이라는 뜻으로 나타난 ‘이데올로기(Ideologie)’라는 말의 의미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두산백과) 이렇게 이데아는 인간의 관념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모든 이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데아는 ‘초월적 현상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이데아적 사고가 종교를 형성하고 그 이념(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나 견해)을 따르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게 한다. 종교적 신념(굳게 믿는 마음)에서 이러한 이데아적 요소가 빠지면 그 결속력은 약해진다. 그래서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4차원의 세계를 배제하고는 종교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이유다,

차원(dimension)은 직선 1차원, 평면 2차원, 보통의 공간 3차원, 상대론(相對論)에서 의 시공(時空) 4차원으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공간 속에서 독립적으로 취할 수 있는 좌표축의 최대수가 그 공간의 차원을 나타낸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Science적 해석이지만 종교적 의미로서의 4차원은 이성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해석 되지 않는 초월적 현상을 의미한다. 그것을 종교에서는 신적 존재의 역할, 활동으로 규명하고 그러한 경험에 대해서 신성한 것, 불가침 되어야 하는 어떤 것, 특별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한 초월적 경험을 통해서 그것들의 현상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다르다고 생각하는 잣대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과거 과학이 많은 것들을 규명하지 못하던 원시 시대에는 더더욱 두려움이 극에 달했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경이로움이었고 보여 지는 현상들 대부분은 두려움의 발로(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였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면서 그것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러함의 현상들은 무한 반복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지식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은 여전히 신적 영역으로 밀어 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인간 지식은 언제나 그 궁극적 목표를 죽음을 극복하는 것에 두고 있는 것이다.

초월적 현상!
초월적 경험!

이것은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죽음과 대비되는 삶의 소망에서 기인한다.

이데아적 이념!
신적 존재에 대한 신념!

인간의 가장 큰 불안인 죽음을 알고 있는 인간이 가장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이러한 초월적 현상은 어떤 특정 종교의 신에게서 얻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월적 현상은 신의 역할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만들어 내는 특별한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이라 말 할 수도 없는 어떤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도 똑 같은 특별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 3개의 종교적 신념을 따른 경험이 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를 각각 18년, 8년, 6년 이상 현재까지 나는 이 모든 종교의 교리를 모두 배웠고 각기 다른 종교에서 지금껏 말하고 있는 ‘특별한 현상’즉, 4차원의 현상을 대부분 경험했고 지금도 그러한 현상은 나에게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나는 사실 이러한 ‘특별한 현상’즉,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아적 해석으로 설명되어 지는 현상들을 경험했고 그 현상에 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별한 현상’은 인간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특별한 사람, 종교에서 말하는‘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인가?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은 신적 영역이라 치부하지만 그것은 결코 신의 역할이 아니라 인간 개인의 특성에서 경험되는 현상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특별히 최면에 잘 걸리는 사람은 최면술사의 능력이 아니라 개인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여리고, 막연한 신념을 따르고, 초월적 현상을 갈구하는 심리적 특성이 ‘특별한 현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 부분이 아닌 타고난 특성이다. 선택받은 가문이어서 종교인이 대대로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특성을 가진 유전적 특질이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대로 교육되고 학습되는 과정에서 반복되고 지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개인적 특질들에서 보여 지는 현상들을 종교집단을 만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기를 위해 그러한 인간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종교집단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요건(필요한 조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집단의 특성과 차별성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정 단어를 만들어 구분 짓고, 종교 의식을 차별화 하고,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 제도화 시킨다. 이러한 종교적 사고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이성적 심리적 활동이 제한을 받게 되고 끊임없는 세뇌과정을 통해 변화된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자유로운 인간이 죽음으로서 인조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종교화 되고 나면 과거의 사고나 인식은 모두 옳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고 새롭게 주어진 인식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타인들과 구분 짓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종교는 발전되고 유지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특별한 현상’이 주는 ‘특별한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통해 느끼고 알게 된 것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있다. 본인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불의에 담대히 맞서 싸울 용기를 내고, 힘들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가치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다.

그것은 어떤 차별도 아니고, 그것은 남다른 우월함도 아니다. 그러함이 있건 없건 그래서 더 알 든 모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어떠할 것이냐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최선을 다해 타인과 다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안다고 하는 것도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지하며 어리석은 것이다. 본인이 타인보다 좀 더 뭔가를 안다고 생각한다면 타인보다 더 많이 인내하고, 더 많이 보듬고, 더 많이 바꾸어 가며 살 일이다.

나는 왜?
MBC 대주주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에잇! 폐기되어야 할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