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저요? 몇 살이나 된 것 같아 보이나요?”






“글쎄, 한 40대 후반? 아직 50은 넘지 않으셨지요?”






“…, 아, 그렇게 보여요? 실은 지금 46이거든요. 닭띠예요.




우리 나라 나이론 47이구요.”






만나자 마자 나이부터 묻고, 고향 묻고, 출신학교 묻고, 전공 묻고, 어디 사느냐고 묻고….




지금 무슨 취조하는 거냐?




그래도 궁금한 걸 어쩌라고?








가뜩이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흰 머리가 신경 쓰이고, 가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고, 길을 걷다가도 비슷한 또래의 중년을 보면 괜히 눈을 피하고, 백화점이나 시장엘 가도 아저씨들의 눈과 마주치면 반가운 생각도 드는데, 어떻게 된 게 만나기만 하면 나이부터 묻는다.




책을 보려고 앉았다가 갑자기 침침해지는 눈 때문에 깨끗한 안경을 한 번 더 닦고, 공항이나 비행기에서 신문을 읽을 때면 아예 안경을 벗고 보다가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 따라 멀쩡한 것처럼 행세를 하기도 하지만, 역시 나이는 속일 수가 없다고 하며 한탄을 하지만, 가는 세월의 나이테를 어쩌랴?






여기서 잠시 반란을 일으켜 볼까?






며칠 전 일본에서 두 분의 할머니가 별세하셨다. 한 분은 술집마담이셨는데, 향년 101세로, 돌아 가시기 전날까지 술집에 나와 술을 팔고, 손님을 접대하고, 각종 신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섭렵하여 고객들과의 대화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다른 한 분은 116세로 기네스북에도 기록된 최고령 노인네였다.






세계적인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지금 94세이다.




클레이몬트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 서점에 가는 곳마다 그의 책이 몇 권씩 진열되어 있다. 어디 우리 나라 서점에만 깔려 있겠는가? 전 세계 전국 서점에 그의 글은 수개국어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




지난 해말, 건강이 나빠서 고생을 했던 코미디언 한 분은 78세인 연세에 전국을 돌며 코미디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1905년도에 태어나서 1925년도에 일본 동경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한 화가를 올 봄 어느 미술전문지의 인터뷰기사에서 뵈었다.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는 환갑을 넘긴 올해,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은 35세의 아내로부터 딸을 얻었다. 우리 나라가 한창 어려웠던 6.25전쟁 직후, 가난한 농부들에게 정신적 지주로써, 농촌혁명아로써 새마을운동의 기틀을 바로 잡은, 前 국회의원 한 분께서는 지금 안양근처 농촌교육원에서 매년 100여명의 후학들을 선발하여, 한 달에 이틀씩 먹이고 재우며 1년간의 무료교육 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올해 칠순을 지내셨다.






이런 어르신네들과 자리를 같이 할 때 40-50대 되신 분들은 술상을 나르고 자리를 양보하고, 옷깃을 여미어야 한다.




어른 대접은커녕 애들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까?






“나이는 묻지 마라. 숫자에 불과하다. 세대차이는 나이가 아니라 태도이다.(Generation gap is not age. It’s just attitude.)” 란 말을 기억하면서 힘을 내기로 하고, 어떻게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남자가 알고 있다면, 그 남자는 그 여자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여자들도 혼자 있을 때는 별 짓을 다하는가 보다.




남자들도 혼자 있을 때는 별의별 짓을 다한다. 혼자 있을 때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경우만 그런 건 아니지만, 뭔가 바쁜 일이 있어도 문득 딴짓을 하게 되는 건 인간도 동물의 한 종(種)이기 때문일까?






50대 초반인 K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웠다. TV를 몇 시간씩 보기도 하지만, 부정부패와 사건사고 일변도의 뉴스와 어린 아이들의 놀이감만 넘쳐나는 요즘 프로그램은 오히려 “정신적 공황상태”를 강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자주 만나지 않던 친구로부터 조언을 듣고 새로운 즐거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클래식엔 문외한이었고 책하고는 담을 쌓은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술이 취한 어느 날 저녁, 친구녀석과 함께 인사동 어느 찻집에서 알아 듣지도 못하는 음악을 들으며 떠들던 중, 옆에 앉아 있던 취객으로부터 좋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자랑 삼아 들고 들어 와 쳐 박아 둔지 일주일이 지날 무렵, 일요일 저녁이었다. 아내 와 심한 말다툼을 하고 밖으로 나왔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난 길거리 커피숍에 들러 차를 마시던 중, 낯선 이로부터 받은 책과 똑 같은 것이었다. 곧 바로 집어 들어 몇 줄 읽기 시작했다. 몇 페이지도 읽기 전에 지금 자신과 똑 같은 신세를 한탄하는 작가의 마음을 알아 채고 내친 김에 끝까지 읽어내려 갔다. 아니 이 시간에 들리는 음악 또한 그 때 그 저녁 찻집에서 듣던 곡과 비슷한 게 아니던가?




그냥 흘려 듣기엔 괜찮은 곡이었지만 곡 이름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주인에게 다가 가 CD케이스를 달라고 하여 몇 곡을 훑어 보았다. 베에토벤, 파가니니, 모짜르트… 모두 학창시절에 들어 본 이름들이다. 그래도 음악의 제목이나 작곡가와의 연결은 기억되기 힘든 것들이었다. 어쨌거나 몇 시간은 족히 “만족하는 자유의 시간”이었다. 몇 천원의 커피값은 오히려 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그는 자기 방에 꽂혀 있는 먼지 쌓인 책들을 꺼내 본다. 가끔 서점에 들러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으로 다가 가서 어깨너머로 책을 훑어 보며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즐거운 생각을 한다.




TV를 끄고 음악을 듣는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엔, 바이올린 협주곡이 잔소리 하는 아내의 목소리보다 감미로울 때가 많다. 그는 “책 읽는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고전음악을 듣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별도의 장소가 필요 없다. 차 안에서 누구를 기다릴 때나, 찻집에서 시간이 남았을 때나, 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에 방에 혼자 있을 때, 깊은 산 속에 앉아 쉬고 있을 때, 이 두 가지 행위는 한꺼번에 가능하다는 거다.






운동을 하려면 마땅한 장소가 필요하고 함께할 상대가 필요하다. 때로는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과 식사도 해야 하고 술자리도 하게 된다. 책과 음악은 그런 제약으로 부담을 주지 않는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혼자 낄낄 웃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고, 혼자 눈물을 흘려도 흉볼 사람 없다. 조용히 방구석에 쳐 박혀 고전음악을 들으며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한 삶의 희열을 맛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흰 머리카락도 늘어 나지만, 전철에서, 공원에서, 거실에서, 안방에서, 운동장 한 구석에서, 그린필드 옆 벤치에서 책을 들고 글을 읽는 모습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는 사람도 기쁘다. 중년 부부끼리 예술의 전당을 찾아 오고, 음악회 팜플렛을 들고 거리를 걸어 가는 모습은 왠지 고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자동차 트렁크엔 골프세트가 가득하지만, 뒷좌석 위에는 몇 권의 책이 놓여 있고, 운전석 옆에는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곡과 가곡과 국악의 향연 CD가 몇 개 더 있으면 사람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짧은 글을 쓰거나 창작활동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사업과 직무를 통해 겪은 일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해 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나이 먹고 갈 곳이 없고 할 일이 없어 지루해 하며, 그래서 더 빨리 늙는다는 걸 걱정하는 건 한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다면 어찌 지루한 날들이 있겠는가?




이런 것들을 갖추고 향유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건 지식과 학력의 문제는 아니다. 재정적 부(富)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바람도 피우고 싶고, 젊은 아이들과 술도 한 잔 하고 싶고, 기쁨조를 불러 들여 노래도 한 곡 빼고 싶은 중년이지만, 그런 데서 오는 가벼운 즐거움과 희열도 맛보고 싶은 중년이지만, 그 동안 해보지 않은 짓들을 해 보면서 고상한 가치의 쾌락에 접근해 보는 것도 해 볼만한 일이다.




다만, 한가지 조건이 있다. 나이는 묻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