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삶을 경멸하고 죄악시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일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동성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별해 보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런 친구들은 일시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하지만 대부분 이성애자로 돌아온다. 프로이드는 동성애가 부모의 양육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했지만 이 주장은 과학이 발달하기 전 특별한 과학적 근거 없이 심리적 현상만을 갖고 만든 이론이다.

최근에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성소수자의 형질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태아 때 결정된다. 태아의 원판은 여성이다. 남자가 젖꼭지 같은 여성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극심한 기아를 경험한 전쟁 때는 남자의 젖꼭지에서도 젖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수태 후 6~8주가 지나면 남자태아 XY는 안드로겐이라는 다량의 남성 호르몬을 공급받는다. 안드로겐의 첫 번째 역할은 고환을 형성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여성적 두뇌를 남성적 두뇌로 바꾸는 데 작용한다. 만약 남자 태아가 적절한 시점에 충분한 남성 호르몬을 공급받지 못하면 게이가 되거나 양성이 된다는 이론이다.

식물에서도 동물에서도 양성의 특질을 보이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그런 특징을 갖는 수가 많지 않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특정 성에 대한 특징이 두드러지는 때는 호르몬 분비가 활발해 지는 사춘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는 잘 모르고 있던 성적 성향이 사춘기에 두드러지면서 자신도 몰랐던 특성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상담을 했던 청소년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개신교를 철저하게 믿는 어머니로 인해 자신의 그런 성향을 알리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안타까웠었다.

많은 과학이 그러하듯 인간은 무지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았는가? 마찬가지로 프로이드의 이론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던 부모는 이제 자유를 얻어야 한다. 성소수자 또한 자신들의 특질이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유전적 특질로 결정지어진 성소수자들도 있지만 자의적 선택으로 성소수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트라우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삶의 형태를 버리고 특성화된 삶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성소수자의 삶을 계속 영위하기도 하고 그만 두고 이성애적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에 변수가 많다.

아무튼 그가 어떤 형태의 삶을 살던 인류는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 어느 누구가 개인의 삶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진 삶이라면 또한 감사함으로 하루를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면 된다. 자신들의 가치나 이념과 맞지 않다고 해서 그들을 매도하고 죄악시하여 저주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혹은 나서서 그들의 삶을 파탄내고 무리에서 추방시키는 등의 행동을 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그것이 자식이라 하더라도 결정지을 수 없다. 소중하지 않는 인간은 없고 가치 없는 삶은 없다. 그들이 어떠한 삶을 선택하든 그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특히 이러한 성소수자의 삶을 문제시하고 죄악시 한 기독교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성소수자의 삶이 처음부터 터부시 되거나 죄악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자행한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역사적 행태를 안다면 말이다.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신자를 늘이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극히 옹졸하고 이기적인 욕심으로 그들을 죄인으로 몰고 가지만 않았다면 그들이 지금처럼 서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사랑은 이미 없고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 이기적인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전체를 아우를 수 없는 종교는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은 이유를 막론하고 인정되어야 하며 지켜져야 할 인간의 기본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