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나의 운명을 믿고있나
그림 : http://1011ajh.blog.me/10090780413



언젠가 친구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세상에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운이 있는 데, 난 아직 그 운은 못만난 건지, 아니면 이미 흘러갔는 지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그래도 세상은 자기만 열심히하면 못할 게 없다고 하면서, 나보고 미신을 믿는다고 타박을 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난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50여년이나 살아오면서 자기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할 수있다고 믿는 게 너무 순진한 것 아닌가?



‘카오스’라는 책이 있다. 자연은 언제나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같은 데, 예측할 수없는 결정적이 순간에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변할 지를 도무지 예측할 수없다. 그러면서 나오는 것이 ‘나비효과’이다. 아무리 슈퍼컴퓨터를 수십대 돌려도 아직 인간의 기상예측은 하루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로 실컷 밤새 계산하고는, 결정적인 해석은 인간의 숙련도에 따른다나. ‘나비효과’의 주안점은 자연에는 변수가 너무 많을뿐더러, 각각의 변수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미리 예측할 수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변수란 너무나 작다. 나머지는 변수가 스스로 움직이는 데, 마침 나의 의지와 그 변수가 맞아들었을 때 나는 성공을 할 수있다. 그래서 난 장사는 운칠기삼이 아니라, 운구기일(運九氣一)이라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성공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머지 90%이상의 사람들도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게으르거나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 결국 그 차이는 ‘운’이 그만큼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경영을 하다보면 참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많다. 그리고 한치앞을 내다보기도 어렵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 지 전혀 감도 오지 않는데, 돈을 들여야 할 때가 많다. 자칫하면 적지 않은 돈이 날라가고, 잘해야 본전일 때를 접하면, 단 하루만이라도 미리 알면 도움이 될 텐데 하는 기분이 든다. 특히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금이나 회사운영계획을 세워야 하는 경영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직장인보다 점술가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경영하는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가 직장인에 비하여 훨씬 자주있고, 그로 인한 부담도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사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도 가장 유망한 직종으로 점술가가 꼽혔다고 적힌 기사도 있었으니,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나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 운이라는 게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운에 대하여 설명을 해놓은 책이 있다. 바로 연준혁과 한상복이 지은 ‘보이지 않는 차이’라는 책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애매모호한 것을 답답해하며 참지 못한다. 애매한 상황이 닥치면 그것을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 분석하고 계획하고, 목표부터 수립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때로는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이것인지, 아니면 저것인지’ 분명하게 매듭짓자며 목소리를 높인다. 사실은, 성급하게 가능, 불가능을 결정하기 때문에 재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인지 아니면 저것인지’ 섣부르게 선택을 하고나면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다. 의외의 행운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 대척점에 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조용히 성공을 일궈내고 그것을 지켜간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있다고 본다. 차이는 ‘가능성 항아리의 뚜껑을 언제나 열어놓고 있느냐’에서 갈린다.” 그러니까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의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하면서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올거라는 믿음을 놓치말라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열심히 살되 ‘who knows’다.

운(運)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니 더욱 그렇다.



운(運) = 천천히 걸어갈 착(辶) + 덮을 멱(冖) + 수레, 바퀴 차(車)

= 수레위에 싣고 덮은 뒤(그래서알 수없다) 천천히 이동해간다.

이런 걸 볼 때마다 한자라는 게 참 멋있는 글이라는 감탄이 절로 난다. 그리고 나에게 운이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보여준다. ‘오래 열심히 끌고 니다 보면 덮어져 있는 운이 하나둘 벗겨져서 보인다’. 그래서 ‘운’은 포기하는 자에게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사업은 오래도록 할 수있게 버텨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운’이라는 것이 인간사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면 세상은 참 재미없을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신이 그의 운명을 점지하여주었다는 ‘예정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거지가 될지, 부자가 될지, 천당에 갈지, 지옥에 갈지 정해졌다면 굳이 그 상황을 개선하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정설은 칼뱅이 주장하였다. 그런데 만일 칼뱅이 자신은 거지로 살아야 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예정되어 있다면, 이 예정설을 믿었을까? 그가 주창한 이론이지만 그 이면에는 ‘나는 잘 살아야 하고, 죽어서도 천당에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말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결국 신이 어떻게 마음을 잡수셨던 간에 내 인생은 잘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난 신을 믿지 않는다.” 칼뱅은 자기가 마음대로 신의 마음을 해석하고 이를 남에게도 강요했다. 그가 그랬다면 나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있다. 이 걸 내가 좋아하는 말로 바꾸면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은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이다.



‘보이지 않는 차이’에서도 결론은 이렇다.

“좋은 해석 앞에서는 아무리 무서운 불운과 악운이라도 꼬리를 내리고야 만다는 것이다.”

또한 “선인들은 지금 운이 나쁘다면, 과거의 악업을 청산해주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였다. 예전의 빛을 갚기 위해 지금의 시련이 있는 것이란 해석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이 어떻건, 과거가 어땟 건간에 ‘자기 운명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어야, ‘좋은 해석’이 나올 수있다. 사장은 삶의 끝에 갔을 때, 나의 삶은 결국 풍족해지고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때로는 선택을 잘못할 수도 있고, 너무 좋은 행운에 입이 찢어지게 기분좋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사업이다. 그 것은 끝없는 고민의 연속이다. 그 롤러코스터같은 사업의 과정에서 언젠가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에 도착할 것이라는 ‘나의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재미없는 삶이고, 기복이 심한 사업을 금방 포기하게 된다.



창업, 자신의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기에는 겪어야 할 고뇌가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