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태헌의 한역(漢譯)]


春在吾君前(춘재오군전)



吾輩人生涉世中(오배인생섭세중)


濤日風辰焉稀少(도일풍신언희소)


若逢如彼日(약봉여피일)


無聲自下錨(무성자하묘)


今日多端事(금일다단사)


暫時置低所(잠시치저소)


愛戀事亦然(애련사역연)


濤日與風辰(도일여풍신)


不衝高大浪(불충고대랑)


向底如潮兟(향저여조신)


可愛可憐吾君兮(가애가련오군혜)


不受傷愛何處傳(불수상애하처전)


氣結隆冬今盡經(기결융동금진경)


花開次序在君前(화개차서재군전)



[주석]


* 春在(춘재) : 봄이 ~에 있다. / 吾君前(오군전) : 그대 앞.


吾輩(오배) : 우리, 우리들. / 人生涉世中(인생섭세중) : 사람으로 나서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인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濤日(도일) : 파도치는 날. / 風辰(풍신) : 바람 부는 날. / 焉稀少(언희소) : 어찌 드물랴!


若(약) : 만약. / 逢如彼日(봉여피일) : 그와(저와) 같은 날을 만나다.


無聲(무성) : 말없이, 조용히. / 自下錨(자하묘) : 스스로 닻을 내리다.


今日(금일) : 오늘. / 多端事(다단사) : 복잡다단한 일.


暫時(잠시) : 잠시. / 置低所(치저소) : 낮은 곳에 두다.


愛戀事(애련사) : 사랑하는 일. / 亦然(역연) : 또한 그러하다.


與(여) : ~과, ~와에 해당하는 연사(連詞:접속사).


不衝(불충) : ~과 부딪히지 않다, ~과 부딪히지 말라. / 高大浪(고대랑) : 높고 큰 파도.


向底(향저) : 낮은 곳을 향하여, 낮은 데로. / 如潮(여조) : 조수와 같다, 조수처럼. / 兟(신) : 나아가다.


可愛(가애) : 사랑스럽다. / 可憐(가련) : 가련하다, 어여쁘다. / 吾君兮(오군혜) : 그대여! ‘兮’는 호격(呼格) 어기사(語氣詞)이다.


不受傷愛(불수상애) :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랑. / 何處傳(하처전) : 어디에 전해지랴, 어디에 있으랴!


氣結隆冬(기결융동) : 기운이 엉기는 추운 겨울. / 今盡經(금진경) : 이제 모두 지내다, 이제 모두 다 겪다.


花開次序(화개차서) : 꽃이 피어날 차례. / 在君前(재군전) : 그대 앞에 있다.



[직역]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인생이 세상 살아가는 중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이 드물랴!


그런 날을 만나면


조용히 스스로 닻을 내리고


오늘의 복잡다단한 일을


잠시 낮은 곳에 두어야 한다


사랑하는 일 또한 그러하여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고 큰 파도와 부딪히지 말고


낮은 곳을 향해 조수처럼 가야 한다


사랑스럽고 어여쁜 그대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에 전해지랴


기운 엉기는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한역 노트]


우리의 오랜 대중가요 가운데 <청춘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의 가사에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는 구절이 있다. 봄이 곧 꿈이라는 얘기니, ‘그대 앞에 봄이 있다’는 시의 제목이나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는 시구(詩句)는, 그 꿈이 곧 실현될 것임을 얘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자는, 시인의 이러한 언어가 그 어떤 덕담보다도 더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진 것이 보잘것없고 앞에 놓인 조건이 더없이 열악하여도, 우리에게 꽃을 피우리라는 꿈이 있고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열정이 있다면,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바퀴에 깔린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일념(一念) 하나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였다는 어느 서양 여인의 이야기처럼 간절함의 힘은 정말 위대한 것이다.


자연과학 용어 가운데 춘화현상(春化現象, Vernaliz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식물이 반드시 저온(低溫) 과정을 거쳐야만 꽃이 피거나 발아(發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데 개나리와 진달래, 튤립과 백합 같은 꽃들이나 가을보리 같은 농작물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시에서 얘기한 ‘파도치는 날’과 ‘바람 부는 날’, ‘추운 겨울’은 바로 우리 사람들이 겪게 되는 저온 과정, 곧 시련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혹한을 겪은 뒤의 봄꽃이 더 찬란하듯, 시련을 겪은 뒤의 인생 개화(開花)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어느 시대나 또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온 나라가 아니, 온 세상이 바로 그런 시간의 터널을 더디고 힘겹게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따지고 보면 시련의 상징인 저 봄꽃들을 보며 우리는 이제 우리가 꽃으로 피어날 준비를 해야 한다.


역자는 김종해 시인의 이 시를, 오래 전부터 역자의 마음이 힘들 때면 버릇처럼 꺼내보고는 하였다. 말하자면 이 시는 역자에게 하나의 활력소이자 진통제였던 셈이다. 자전거의 신(神)으로 불리는 대니 매카스킬(Danny MacAskill)이 그의 조국인 스코틀랜드에서 목숨을 건 산악 라이딩을 보여준 “The Ridge[산등성이]”라는 동영상과 함께 역자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역자가 힘들 때면 언제나 위안을 준다. 그러니 어찌 시가 고맙지 않겠는가!


연 구분 없이 14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오언과 칠언을 혼용한 14구의 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하는 과정에서 제11구처럼 부득이 원시에는 없는 말을 보태기도 하였다. 원시에는 연 구분이 따로 없지만 1행~6행, 7행~10행, 11행~14행 이렇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한역시에서는 이를 고려하여 해당 단락마다 운(韻)을 바꾸었다. 이 시의 압운자는 ‘少(소)’·‘錨(묘)’·‘所(소)’, ‘辰(신)’·‘兟(신)’, ‘傳(전)’·‘前(전)’이다.


2020. 3. 24.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