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한국은 17일간의 열전에서 금메달 9개, 은메달 3개, 동메달 9개로 종합순위 8위에 올랐다.

21개의 메달만 감동을 준 것은 아니었다. 아주 조금 모자랐을 뿐 도전만으로도 아름다운 장면이 많았다. 메달의 유무로 땀의 가치를 따진다면 이들의 올림픽은 조금 억울하다.

○‘저 이제 가요’ 요정의 작별인사
손연재 ⓒ gettyimages/이매진스
손연재 ⓒ gettyimages/이매진스
0.225점. 2012년 런던올림픽 리듬체조 개인종합 동메달과 5위의 점수차다. 당시 손연재(연세대)는 곤봉에서 통한의 실수를 범하며 눈앞에서 메달을 놓쳤다. 최종 5위. 아시아 선수로는 전인미답의 기록이었다.

4년을 기다린 리우에서도 메달은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동메달을 두고 경쟁하던 간자 리자트니노바(우크라이나)의 마지막 리본 연기가 완벽하게 끝났다. 전광판을 바라보던 손연재는 박수를 치며 축하했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연재의 눈물엔 많은 게 담겨 있었다. 최종 4위로 한 계단 도약했다는 기쁨도, 다시 메달을 놓쳤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선수로서 마지막 무대였다는 점에서 복잡한 감정이 흘러내렸다.

리듬체조 불모지에 어느 날 찾아온 ‘요정’은 그렇게 자신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실수에 당황하던 4년 전 미완의 모습을 지우려는 듯 무결점의 연기로 아름다운 작별을 고했다.

○’명경기 제조기’ 정영식
정영식 ⓒ gettyimages/이매진스
정영식 ⓒ gettyimages/이매진스
172명의 선수가 출전해 귀화하지 않은 중국인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종목. 올림픽 탁구를 함축한 표현이다. 중국이 탁구에서 초강세를 보이는 까닭에 대진표에 따라 탈락 시점이 가늠되기도 한다.

정영식(미래에셋대우)이 받아든 대진표에 따르면 16강 탈락은 예견돼 있었다. 모두가 당연한 패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영식이 끝내 눈물을 흘린 것은 그 패배가 결코 당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롱 ⓒ gettyimages/이매진스
마롱 ⓒ gettyimages/이매진스
정영식은 세계 랭킹 1위 마롱(중국)을 맞아 말 그대로 분패했다. 세트 스코어는 2 대 4였지만 정영식이 내준 마지막 두 세트는 듀스 접전 끝에 놓친 세트였다. 마롱이 금메달을 따는 과정에서 가장 고전한 게임이기도 했다.

단체전에서 설욕을 다짐한 정영식은 끝내 마롱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대신 개인전 은메달리스트인 장지커(장국)를 4강전 1단식에서 만났다. 역시 초접전 시소 게임을 벌인 끝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장지커도 지옥을 경험했다.

한국 탁구는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정영식의 반란도 아쉽게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를 통해 굉장히 중요한 것을 목격했다. ‘만리장성의 균열’이다.

○김국영의 외로운 질주
김국영 ⓒ gettyimages/이매진스
김국영 ⓒ gettyimages/이매진스
김국영(광주시청)의 올림픽은 10초 만에 끝났다. ‘한국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는 올림픽 육상 100m 준결승 진출이란 숙원을 풀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10초37. 전체 70명 가운데 공동 51위였다.

비록 예선 탈락이었지만 한국 선수가 올림픽 100m 트랙에 서는 것조차 20년 만의 일이었다. 김국영이 2010년 전국 육상선수권대회에서 10초31을 기록하기 전까지 한국 기록은 31년째 10초34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국영은 같은 대회 준결승에서 10초23으로 기록을 연거푸 앞당겼다. 올해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선 다시 10초16으로 경신했다.

김국영은 올림픽에서 자신의 기록을 다시 세운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의 신기록은 곧 한국 신기록이기도 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선글라스도 벗어던지며 최선을 다짐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역시 높았다. 트랙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국영은 이방인이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셔틀버스에서 일본, 중국 선수들은 동료들끼리 대화했다. 하지만 김국영은 혼자였다. 그는 “일본, 중국 선수들은 자국이 아닌 세계와 경쟁하고 있었다”며 “나도 후배들과 함께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다. 그때 꼭 오늘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유일 올림픽 스프린터의 목표는 2018년까지 9초대 진입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우하람 ⓒ gettyimages/이매진스
우하람 ⓒ gettyimages/이매진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가 쓰여졌다.

남자 다이빙 10m 플랫폼에 출전한 우하람(부산체고)은 한국 다이빙 사상 최초로 올림픽 결승 무대를 밟았다. 경영을 제외한 수영 종목 첫 결승이기도 했다.

우하람은 플랫폼보다 싱크로나이즈드와 3m 스프링보드에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싱크로나이즈드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스프링보드는 강풍에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며 예선에서 탈락했다.

우하람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결선 진출이란 1차 목표를 이뤘다. 2차 목표는 당연히 올림픽 메달이다. ‘선구자’의 나이는 겨우 18살이다.

○’무관의 여제’ 김연경
김연경 ⓒ gettyimages/이매진스
김연경 ⓒ gettyimages/이매진스
김연경(페네르바체)의 도전이 다시 막혔다. 시작은 좋았다. 런던에서 일본에 당한 패배를 기분 좋게 설욕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중과부적이었다. 함께였지만 외로운 싸움이었다. 김연경 이전의 배구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김연경은 4년 전보다 필사적이었다. 국민적 기대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성기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음’이란 기약할 수 있는 것이되 장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 대회는 김연경이 왜 세계 최고의 선수인지를 증명하는 무대였다. 다만 정작 그녀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고군분투는 미안함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산화한 꿈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귀국에 맞춰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김치찌개 회식’을 언급하는 대신 협회의 부족했던 지원을 지적했다. 김연경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후배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그녀는 도쿄올림픽 도전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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