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의 별명은 "캡틴"(captain)이었다. 56년 필리핀오픈 한국팀단장으로 참가하게 되자 고 김정렬 전 국무총리,유재흥 전 국방부장관,장홍식 전 극동석유회장 등 친구들이 붙여준 애칭이었다. 함께 출전했던 연덕춘 박명출 프로등도 "캡틴"이라고 부르면서 별명으로 굳어졌다. 허회장은 "캡틴"으로서 자질도 타고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극동석유 회장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한번은 함께 영국을 동행하게 됐는데 허회장은 보따리가 아주 많았다. "이게 다 뭐냐"고 물었더니 "이사람 저사람들에게 줄 선물"이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거기에는 영국왕립골프협회 여비서에게까지 줄 선물이 들어 있었다. 유 전 장관은 일본 오사카를 함께 여행하면서 식당에 들어갔는데 한 종업원이 허 회장을 극진하게 대우하길래 어떻게 된 거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그랬더니 들어오다가 팁을 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미리 손을 써놔서 그렇다고 했다. 허 회장은 아랫사람에게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직원이 실수를 해도 전혀 혼내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절대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지인들은 기억했다. 허 회장 사무실에는 고향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 특히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계속 들락거렸다. 그렇지만 귀한 손님처럼 대하며 용돈을 주곤 했다. 그의 마음씀씀이를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대목. 허 회장 부친은 대지주였다. 허 회장이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소작농들한테 가서 임대료를 받아오도록 시켜 전년도 수준의 임대료를 받아왔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절반도 못 받아왔다"며 벌컥 화를 내더라는 것이다. 풍년이 들었는데 왜 더 받아오지 못했느냐는 질책이었다. 그러나 허 회장은 "식구는 많고 사는 게 너무 형편없어 이 정도 받아오는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허 회장은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친구들이 술마시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나섰다. 몸이 힘들어도 자신의 주장은 절대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골프동호회인 '목동회'에는 힘깨나 쓰는 권력층들이 많았다. 허 회장이 워낙 성품이 좋다보니 권력층 인사들도 그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원칙을 지켜야 할 때는 가차없었다. 한번은 경주에서 시니어골프대회가 열렸는데 허 회장과 친분이 있는 한 선수가 보기를 했는데도 파를 했다고 스코어를 속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그 선수는 대회는 포기하고 라운드만 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허 회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실격이니 당장 돌아가라"고 엄격하게 대했다. 허 회장은 홀인원을 3번 기록했다. 모두 서울CC에서 기록했고 정작 자신이 만든 남서울CC에서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골프장에서 골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에이지 슈팅'(자신의 나이 이하의 타수를 기록하는 것)을 기록했다. 89년 6월 74세 때 남서울CC에서 72타를 쳤다. 그날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주한 말레이시아대사를 환송하기 위해 주한 영국대사 및 호주대사와 고별라운드를 하던 중이었다. 허 회장은 당시 "나도 놀랐다.치면 볼이 똑바로 가는 데다 거리도 났다.파3홀에서는 치면 핀에 딱 붙어서 버디를 했다.롱퍼팅도 쏙쏙 들어갔다.그렇게 골프가 잘된 날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각국 대사들과 골프를 했으니 '기브'(OK)는 하나도 없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