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창업의 길에 들어선 한정수 씨(30). 국내 한 신용카드사 홍보팀에서 일했던 그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투자해 30억원이 넘는 돈을 벌고 지난해 3월 사직서를 냈다. 그가 요즘 하는 일은 웹드라마와 영화 제작이다. 평소 ‘K콘텐츠’에 관심이 많아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었다는 한씨는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무슨 일인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고 말했다.

○‘은퇴 결심선’은 30억원

"코인 300만원 투자해 30억 벌어…그래도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이 직접 만난 12명의 코인 파이어족 중에는 자산 수준이 30억원을 넘어가면서 ‘사표’를 결심했다고 말한 이들이 많았다. 연간 생활비의 25배를 확보하면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다는 이른바 ‘25배 법칙’보다는 큰 규모다. 코인 파이어족들의 현재 자산은 30억원 이하 3명, 30억원 초과~100억원 미만 5명, 100억원 초과 4명이었다. 정보기술(IT)업계에서 개발자로 근무하다 암호화폐 투자로 30억원을 벌고 지난 3월 퇴사한 최종운 씨(34)는 “(이 정도만) 잘 관리하면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코인 파이어족들은 올해 암호화폐 시세가 크게 떨어졌음에도 코인 보유 비중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은퇴 당시의 자산가치를 지켰다. 전체 자산 중 암호화폐로 보유한 자산 비중은 10% 이하 4명, 10% 초과 30% 미만 4명, 30% 초과 50% 이하 3명이었다. 이들은 암호화폐 가격이 급락하는 과정에서 주식, 부동산에 투자해 현금흐름을 확보하거나 현금 보유 비중을 늘렸다. 자산의 전부를 암호화폐로 보유하고 있다고 답한 이는 2명에 불과했다.

○“뺄 때와 진입할 때를 알아야”

전 재산을 암호화폐로 보유한 ‘올인족’은 진입 시점을 조절해 자산가치 하락을 피했다. 30억원 안팎의 코인 자산을 보유한 강모씨(34)는 지난해 말 코인 시장이 과열됐다고 보고 암호화폐 시장에서 철수했다가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재진입했다. 강씨는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방망이를 짧게 잡고, 단타 매매로 자산을 더 늘렸다. 목표 수익률인 10%만 차면 무조건 털고 나와 쉬었다”고 했다.

‘인생을 뒤바꾼’ 투자 계기는 평범하다. ‘지인들의 권유’다. 12명 중 9명은 친구나 지인의 소개로 암호화폐 투자에 손을 댔다고 말했다. 스스로 암호화폐 시장에 호기심을 느껴 진입을 결심했다고 응답한 이는 3명에 불과했다. 투자 시드머니도 1000만원 미만의 소액이 대다수였다. 300만원 이하가 6명으로 절반에 달했고, 300만원 초과 1000만원 이하가 3명이었다. 암호화폐 투자를 위해 대출을 이용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3명에 그쳤다. 익명을 요구한 한 파이어족은 “100만원을 200만~300만원으로 불리는 건 운으로도 가능하지만, 5배 이상 늘리는 건 피 같은 자기 돈을 날려가며 처절하게 실패하고 공부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자산 늘어날수록 명품 관심 뚝”

5년 남짓한 시간에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100억원이 넘는 자산을 모은 코인 파이어족이지만 소비 습관은 오히려 검소했다. 대다수가 자산이 증가할수록 오히려 사치품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15일 경기 의정부에서 만난 코인 파이어족 신모씨(35)는 인터뷰 요청에 흰색 티셔츠와 반바지의 단출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유년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김밥 장사부터 중고차 판매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는 그는 “투자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돈만 있다면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차를 타며 뽐내고 싶었다”면서 “오히려 돈이 많아질수록 사치품에 대한 욕심이 떨어지더라”고 말했다. 암호화폐로만 100억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했지만 운동화를 모으는 취미 외엔 특별한 지출이 없다는 신씨는 “자동차도 10년 넘게 동생과 같이 타고 다닌다”고 했다.

코인 파이어족들은 행복할까. 예상과는 다른 답이 대다수에게서 돌아왔다. 한모씨는 “‘경제적 자유’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더라”고 말했다. 곽모씨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다 해봤는데, 3년쯤 되니까 더 이상 할 게 없더라”며 “우울증 때문에 고생했는데, 그때마다 돈이 없어 친구들과 스크린골프 치던 때가 자주 생각났다”고 했다. 설문 결과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거나 “돈이 행복과는 상관없더라” 등 특별한 변화가 없다고 답한 경우(8명)가 3분의 2에 달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