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100번째 1심 공판이 열렸다. 임 전 차장은 2012년 8월부터 2017년까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 등으로 2018년 12월 재판에 넘겨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정이 더 나쁘다. 양 전 대법원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아 지난달 30일 150번째 1심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은 2019년 5월부터 이어지고 있다.
100회 넘긴 양승태·임종헌 1심 공판
박근혜 정부 때 있었던 소위 ‘사법농단’ ‘국정농단’ 사건 관련 재판이 문재인 정부 임기가 9개월밖에 안 남은 지금까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사법농단 재판은 1심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임 전 차장 측은 100번째 1심 공판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반드시 (사법농단)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연루자들을 단죄해야 한다고 발언한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며 김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신청하기도 했다. ‘마무리’는 언감생심인 상황이다.
국정농단 재판도 지연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피고인 54명 가운데 10명이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 중인 피고인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혐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외 6인 △‘국민연금의 삼성 계열사 부당 합병 개입’ 혐의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본부장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이다.
이들 사건에 대한 최종 결론이 언제쯤 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재판이 가장 지연되고 있는 사건은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이 연루된 국민연금의 삼성 합병 개입 의혹이다. 상고심에 넘어간 지 3년이 넘었으나 대법원이 여전히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과 피고인 홍 전 본부장이 각각 상고심에 “빠른 재판을 부탁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을 정도다.
법리 검토 끝났는데…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이미 사실관계에 대한 법리적 판단이 끝났다”며 “그런데도 왜 이렇게 질질 늘어지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사법부·재계의 유력 인사가 모두 연관된 사건인 만큼 고려할 것이 많아 재판이 늦어지고 있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기는 하다. 특히 국민연금의 삼성 부당 합병 개입 의혹은 엘리엇과 한국 정부 간 국가-투자자 간 소송(ISD)을 앞두고 우리 정부에 불리하게 적용할 수 있어 법원이 일부러 판결을 미루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재판 지연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한 변호사는 “정치인과 기업인이 연루된 사건뿐 아니라 일반인 사건에서도 지나치게 재판이 지연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게 사실”이라며 “재판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고인들이 고통받는 시간도 늘어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상고심이야 사건이 워낙 많아 판결이 늦을 수 있다”면서도 “최근 하급심 법원에서도 주 52시간 근로제 등이 정착되면서 선고가 이뤄지기까지 과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석연 법무법인 서울 변호사는 “헌법 27조는 국민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며 “법원이 재판을 오래 끌기보다는 신속한 결론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73)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62)이 각각 참석하는 이른바 ‘사법농단’ 관련 재판은 오후 6시를 넘겨 진행되는 경우가 잦다. 재판 도중 쉬는 시간도 짧다. 쟁점 사안들도 복잡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만큼 당사자는 물론 관계자들도 극도의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두 사람에 대한 재판은 많게는 1주일에 세 번까지도 열린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 초기에는 검찰이 입수한 USB 속 파일 1000여 개를 일일이 법정에서 열어 검증하는 상황도 벌어졌다.차장검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증인 대다수가 현직 판사인 데다 법원 내부가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재판인 만큼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며 “피고인뿐만 아니라 재판부와 검찰의 피로감도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9년 여름에는 재판이 밤 11시를 넘겨 진행되자 양 전 대법원장이 “더는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 퇴정 명령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이처럼 재판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데는 지난 2월 있었던 법원 정기인사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9년 3월부터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을 맡아오던 박남천 부장판사가 2월 인사 때 서울동부지법으로 자리를 옮겼다. 법원 내부에선 “박 부장판사만큼 직권남용 법리에 해박한 사람이 없는데 안타깝다”, “후배 판사들이 참고할 만한 귀한 판결문이 나올 수 있었는데 아쉽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양 전 대법원장 재판은 임 전 차장 재판보다 진행이 많이 됐기 때문에 올해 안에 1심 선고가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런데 대법원이 ‘마무리’만 하면 되는 박 부장판사를 지난 2월 전보시킨 반면 ‘갈 길이 구만리’인 임 전 차장 재판부는 서울중앙지법에 남겨 “대법원이 사법농단 사건의 선고를 속도조절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한편 최근 있었던 검찰 직제개편으로 종전 서울중앙지검 특별공판1팀과 2팀이 담당하던 사법농단 및 삼성 관련 사건 재판들은 모두 서울중앙지검 공판5부에서 맡게 됐다. 비(非)직제였던 팀을 직제부서로 배치한 만큼 공소유지에 대한 검찰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신임 공판5부장은 전 특별공판2팀 팀장이자 박영수 특검의 파견검사였던 김영철 부장검사다.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
서울중앙지검 공판5부가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 사건을 담당한다. 사법농단,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사건도 공판5부에서 맡는다. 관련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들이 중간 간부 인사 과정에서 공판5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1일 서울중앙지검에 따르면 이번 인사로 그동안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 사건의 공소 유지를 담당해 온 김영철 특별공판2팀장이 공판5부장으로 이동한다. 이에 따라 삼성 사건 공소 유지도 공판5부가 담당한다. 특별공판2팀 소속 검사들도 공판5부로 이동한다. 사법농단 사건의 재판을 담당한 단성한 특별공판1팀장은 청주지검 형사1부장으로 옮긴다. 이에 따라 특별공판1팀 검사들도 공판5부로 배속된다. 특별공판1팀에 소속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사건 수사팀원들도 공판5부로 이동해 계속 재판을 담당한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
검찰이 임성근 전 부장판사에게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구형했다. 임 부장판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일선 재판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됐다.검찰은 21일 서울고법 형사3부(박연욱 김규동 이희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임 전 부장판사에 대한 결심 공판에서 "피고인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1심에서도 같은 형량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는 임 전 부장판사의 행동을 '법관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라고 지적하면서도 수석부장판사가 일선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직권 없이는 직권남용도 없다'는 직권남용죄의 일반적 법리에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항소심에서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직무권한의 범위가 넘어서는 부분에서 일어난 부당행위도 직권남용으로 본다고 분명히 했다"며 구형의 이유를 밝혔다. 임 전 부장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였던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임 전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의 요구에 따라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장에게 판결을 선고하기 전에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쓴 '세월호 7시간 행적' 관련 기사가 허위라는 중간 판단을 밝히도록 했다고 판단했다. 임 전 부장판사는 국회에서 탄핵소추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 심리가 진행 중이다. 올해 2월28일 법관임기가 끝나 전직 법관 신분이 됐다.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