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 행정 못벗는 정부
산업 급변하는데 과거 잣대 규제
공정위 등 기업에 잇단 패소
소송 비용으로 혈세만 낭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제기된 행정소송 건수는 연평균 3만7986건으로, 역대 정부 중 가장 많다. 출범 첫해 3만6799건이었던 소송은 매년 늘어나 급기야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4만 건을 돌파했다.
소송의 범위도 과거사 규명·도시개발·회계·헬스케어 산업 등 전방위로 확산됐다. 법조계에선 “‘행정소송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권리의식 높아졌는데 규제로 옥좨
국가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은 기업·개인 등 원고가 이기기 쉽지 않다. 승소율이 10%대에 불과하다. 법원이 삼권분립을 존중해 행정기관인 행정청의 처분이 확실한 위법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쉽사리 그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년간 행정소송이 급증한 배경은 다층적이다.
갈수록 우리 사회가 선진화되면서 국민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는 데 따른 자연적 흐름이라는 분석이 있다. 과거 같으면 당국의 제재를 별다른 반발 없이 받아들였을 사안인데도, 이제는 “법정에서 다퉈보자”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행정소송 분야 전문가인 법무법인 광장의 이종석 변호사는 “공무원들의 이른바 ‘갑질’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커졌다”며 “이런 와중에 제재가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행정소송이 증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최근 수년간 증가폭이 특히 가팔라진 데는 다른 요인이 더 있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첫 번째는 무리한 규제 남발이다. 한 로펌 대표변호사는 “문재인 정부가 최근 수년간 기업과 개인을 옥죄는 규제를 늘리고, 국회에서 입법을 강행한 여파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74석을 장악한 20대 국회에서만 총 2만4141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이전 국회(1만7822건)와 비교해 35.4% 급증한 것이다. 여당은 4월 국회에서도 복합쇼핑몰 의무휴업 확대 등을 골자로 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부동산 시장을 전담하는 감독기구인 부동산거래분석원 설립 내용을 담은 부동산거래 및 부동산서비스산업법 제정안 등 논쟁적 법안 처리를 밀어붙일 태세다.
산업은 빠르게 고도화되는데, 국가 행정체계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유로 꼽힌다. “기업의 합리적 의사 결정을 당국이 과거 잣대로 일도양단(一刀兩斷)하는 바람에 불필요한 비용이 낭비되는 일이 많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계열사 부당지원’을 이유로 최근 5년간 제재를 받은 기업들(신세계·삼양식품·SK텔레콤·한국남동발전·한국수력원자력)이 공정위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6건 모두 ‘공정위 패소’로 결론난 게 이런 사례다. “공정위는 기업들이 계열사와 거래하는 과정에서 적용한 가격이 일반적 시장가격보다 과도하게 낮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했으면서도 관성적으로 제재를 밀어붙였다가 패소를 자초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줄줄 새는 국민 혈세
부담은 결국 국민 몫이다. 소송 비용으로 혈세가 낭비되기 때문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행정청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처분에 대한 행정소송도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이 경우 변호사 선임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된다”며 “정부·지자체가 소송에서 질 때마다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세금으로 메우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혈세 낭비를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선 과잉규제와 예측 불가 행정을 최소화하는 게 필수”(윤정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라고 조언한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법안 위주로 입법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공무원들이 ‘적극행정’을 펼칠 수 있도록 공직사회 분위기를 바꿀 필요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행정소송 경험이 풍부한 법무법인 세종의 김형수 변호사는 “굳이 규제를 안 해도 되는데, 면피하기 위해 처분부터 내리고 보는 ‘보신행정’ 기조가 행정소송 증가에 영향을 끼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침익적 행정처분에 한정됐던 행정소송의 범위가 불허 결정에 대한 불복 등 권리행사의 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이런 의식 변화에 발맞춰 공직사회가 적극적으로 변화를 꾀할 때”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제기된 행정소송 건수는 연평균 3만7986건으로, 역대 정부 중 가장 많다. 출범 첫해 3만6799건이었던 소송은 매년 늘어나 급기야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4만 건을 돌파했다.소송의 범위도 과거사 규명·도시개발·회계·헬스케어 산업 등 전방위로 확산됐다. 법조계에선 “‘행정소송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국가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은 기업·개인 등 원고가 이기기 쉽지 않다. 승소율이 10%대에 불과하다. 법원이 삼권분립을 존중해 행정기관인 행정청의 처분이 확실한 위법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쉽사리 그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년간 행정소송이 급증한 배경은 다층적이다.갈수록 우리 사회가 선진화되면서 국민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는 데 따른 자연적 흐름이라는 분석이 있다. 과거 같으면 당국의 제재를 별다른 반발 없이 받아들였을 사안인데도, 이제는 “법정에서 다퉈보자”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행정소송 분야 전문가인 법무법인 광장의 이종석 변호사는 “공무원들의 이른바 ‘갑질’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커졌다”며 “이런 와중에 제재가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행정소송이 증가한 것”이라고 말했다.그렇지만 최근 수년간 증가폭이 특히 가팔라진 데는 다른 요인이 더 있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첫 번째는 무리한 규제 남발이다. 한 로펌 대표변호사는 “문재인 정부가 최근 수년간 기업과 개인을 옥죄는 규제를 늘리고, 국회에서 입법을 강행한 여파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안효주/남정민 한국경제신문 기자 joo@hankyung.com
온실가스 배출량 검증기관인 A재단은 2019년 환경부로부터 “모니터링 결과에 오류가 있었다”는 이유로 ‘3개월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배출권거래법상 업무정지 규정이 따로 없었는데도 환경부가 처분을 강행한 것이다. A재단이 이에 반발해 낸 행정소송 결과 서울고등법원은 “침익적 행정행위(불이익을 주는 행정행위)를 내리기 위해선 법상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지난 2월 재단 손을 들어줬다.이처럼 기업과 공공기관, 개인이 정부의 무리한 행정처분에 대해 내는 행정소송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 해인 2016년 3만6799건으로 저점을 찍은 뒤 매년 늘어 지난해엔 4만73건을 기록했다. 연 4만 건을 돌파한 것은 처음이다. 전년 대비 증가 건수는 2301건으로, 최근 10년 새 가장 많았다. 검찰청 송무통계상 주요 유형 가운데선 ‘조세관계 행정소송’이 전년 대비 18.0%(334건) 불어나 증가폭이 가장 컸다. 여기에는 납세자가 세금을 과다하게 냈을 경우 당국에 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경정청구’가 포함됐다.주요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 ‘기타’ 유형 증가율도 27.4%(1698건)에 달했다. 소송영역이 시대 변화에 맞춰 혁신산업 바이오산업 등으로 확산된 때문으로 풀이된다. 윤정근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국민의 권리의식이 갈수록 높아지는 가운데 ‘규제 만능주의’가 더 심해진 게 행정소송 급증의 핵심 요인”이라고 지적했다.안효주/남정민 기자 joo@hankyung.com
행정소송 접수 건수가 급증하는 추세에 발맞춰 대형 로펌들도 관련 조직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다. 대형 로펌의 경우 이미 20~50명 규모의 행정소송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팀 역량을 더 강화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행정재판 경험이 풍부한 법조인들을 영입해 방송통신·바이오 등 갈수록 다양화하는 행정 다툼에도 대비하고 있다.19일 법조계에 따르면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올해 김동국 전 대법원 총괄 재판연구관과 조원경 전 대법 재판연구관, 양성욱 전 수원고법 행정부 판사 등을 영입했다. 이 중 김 변호사는 대법 재판연구관 시절 헌법행정조에서 근무하며 주로 일반행정 사건과 공정거래 사건을 다뤘다.김앤장은 최근 행정소송이 늘어나고 있는 방송통신 및 헬스케어 영역에서 주목되는 성과를 거뒀다. 지난해 김앤장이 페이스북을 대리해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이 대표적이다. 방통위는 페이스북이 임의로 접속경로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이용자들이 피해를 봤다며 약 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법원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페이스북 손을 들어줬다.태평양은 자율형사립고(자사고)들이 교육부를 상대로 낸 세 차례 관련 소송에서 모두 승소해 주목받았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자사고 지정취소’ 행정소송은 교육계 안팎의 관심사였다.태평양은 지난 2월 배재고·세화고에 이어 지난 3월 숭문고·신일고의 승소를 이끌었다. 태평양 관계자는 “2014년 자사고 지정취소 처분 당시부터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출신 박태준 변호사를 필두로 전담팀을 구성했다”며 “이후 송무 총괄대표인 송우철 변호사와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인 김경목 변호사를 보강해 자사고 행정소송팀의 역량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이 밖에 광장은 공정거래 관련 행정소송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진 이인석 전 서울고법 행정부 판사, 율촌은 구민승 전 서울고법 판사를 각각 영입했다. 광장은 지난해 8월 줄기세포치료제 개발업체 파미셀을 대리해 식품의약품안전처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에서 승리했다.오현아/남정민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