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모녀 피살' 계기로 불안감…개인정보 노출 경계
여성들 "흔적 지워야"…파쇄기 구매하고 SNS 비공개
직장인 홍모(27)씨는 최근 주변 사람들에게 소형 문서 파쇄기를 사라고 추천했다.

전에는 '유난 떤다', '예민하게 군다'고 핀잔을 듣는 일이 적지 않았으나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이 벌어진 뒤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홍씨는 "개인정보가 적힌 문서를 그냥 버리기 찝찝해 1년 전부터 파쇄기를 쓰고 있다"며 "이전엔 스스로도 너무 예민한가 싶어 말을 꺼내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지인들에게 말하자 다들 '어디서 살 수 있냐'며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살인사건 피의자 김태현(25)이 피해자가 무심코 노출한 집 주소를 이용해 주거지에 찾아간 사실이 알려지자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정보 유출을 막는 방법이 여성들의 큰 관심사가 됐다.

10일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택배 송장이나 영수증 등 개인정보가 포함된 문서를 없애려고 문구점 등에서 소형 문서 파쇄기를 구매했다는 '인증' 글과 택배 송장에 적힌 내용을 지우는 방법을 공유하는 글 등이 다수 올라와 있다.

예컨대 '아세톤이나 향수를 뿌리면 송장 내용을 지울 수 있다'거나 '송장 위에 덧칠해 내용을 지우는 롤러 스탬프를 사용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는 식이다.
여성들 "흔적 지워야"…파쇄기 구매하고 SNS 비공개
남성 이름처럼 보이는 가명을 사용하거나 집 주소를 노출하지 않으려고 다른 장소로 택배를 받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서울 중구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노모(26)씨는 "김태현 사건을 계기로 가족과 함께 산다고 범죄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최근엔 택배를 받을 때 '곽두팔' 같은 가명을 사용하고 직접 수령하는 대신 무인택배함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개인정보를 지우려는 이들도 늘고 있다.

직장인 김모(28)씨는 대학생 때부터 지인들과 교류를 위해 사용하던 SNS 계정을 사실상 폐쇄하기로 했다.

김씨는 "그간 잘 사용하지 않다가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출신학교를 비롯해 거주하는 동네 사진까지 너무 많은 정보가 공개돼 있어 깜짝 놀랐다"며 "해코지하려고 마음먹고 내 정보를 캐면 너무 쉽게 알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구에서 혼자 사는 강모(26)씨도 "김태현이 피해자와 교제하던 사이도 아니고 몇 번 만난 게 전부였다는 사실을 듣고 누구라도 스토킹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메신저 프로필 사진 같은 아주 작은 정보라도 낯선 이에게 사생활이 공개되는 게 무서워졌다"고 했다.

김태현 사건이 전형적인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보여준 탓에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높아진 것으로, 이를 해소할 사회제도와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스토킹 등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불안감을 개인 처신 문제로 놔둘 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나 국가가 나서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며 "올해 9월 시행될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 조항을 보완하고, 지자체는 여성 1인 가구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