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여성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힘쓴 한 저명한 인권변호사가 재판에 넘겨질 위기에 처했다. 경찰의 강압수사 정황이 담긴 영상을 모자이크나 변조 처리 없이 언론에 제보했다는 이유에서다. 변호사들은 “수사 절차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변호인에게 경찰이 보복성 수사를 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경찰, 최정규 변호사 기소의견 송치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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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최근 최정규 변호사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2018년 발생한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 수사 당시 경찰이 외국인 노동자 A씨(피의자)를 강압수사했다는 의혹을 최 변호사가 언론에 제보한 것이 발단이었다.

최 변호사는 경찰이 A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반말과 비속어를 사용하며 윽박지르고, 유도신문을 한 정황을 인지했다. 이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A씨 피의자 진술 녹화영상을 확보한 후, 이 영상을 KBS에 제보했다. 최 변호사는 A씨의 공동변호인단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A씨가 해당 수사관의 동의 없이 영상을 언론에 건넨 점, 모자이크나 목소리 변조 등을 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았다. 최 변호사가 해당 수사관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만큼, 그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게 경찰 판단이다.

최 변호사는 올 1월 ‘제1회 홍남순 변호사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될 만큼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신안 염전 노예 사건’ 피해자를 대리하는 등 이주 여성과 노동자 등을 위한 변론 활동을 펼쳐왔다.

변호사들 “변호인에 대한 보복”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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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는 경찰이 최 변호사를 기소의견으로 송치한 데 대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전날 밤 성명을 내고 “경찰은 변호인에 대한 보복을 즉시 중단하라”고 밝혔다. 대한변협은 “경찰은 강압수사에 대한 반성은 커녕, 변호인의 공익제보를 문제삼았다”며 “이는 현 정부의 공익제보 활성화 방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정이자 우리 사회의 풀뿌리 감시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수사기관의 폭거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경찰 수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국가인권위도 인정한 바 있다. 인권위는 지난해 5월 경찰이 A씨를 추궁하면서 123회에 걸쳐 ‘거짓말 하지 말라’고 발언하는 등 자백을 강요해, A씨의 진술거부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해당 수사관 등에 대해 주의조치를 내릴 것을 경찰에 권고했다.

최 변호사가 실제로 재판에 넘겨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서초동 법조타운의 한 변호사는 “공익적 목적의 영상 제보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검찰이 실제로 최 변호사를 기소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무혐의나 기소유예 등 불기소 처분이 내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다른 변호사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 성립하려면 (최 변호사가) 개인정보 처리자여야 하는데, 최 변호사가 이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라며 “(실제 영상을 보면) 해당 수사관의 뒷모습 정도만 보이는데 이 정도로 그의 신분이 특정이 되는지도 명확하지 않아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최 변호사로부터 제보받은 영상을 보도한 KBS 기자들에 대해선 불기소 의견을 달아 송치했는데, 이 같은 처분도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앞으로 누가 공익제보 하겠냐”

최 변호사는 이날 한국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이번 사건은 저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이런 식으로 처벌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면 앞으로 누가 공익제보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밝혔다. 또 “이전에도 공익제보를 몇차례 한 바 있지만 문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공익 제보자들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1989년 대기업 로비로 인한 감사 중단을 한 언론사에 제보한 이문옥 전 감사원 감사관은 1990년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구속됐다. 1996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이 났지만 오랜 시간 고충을 겪어야 했다. 지난해엔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폭로한 김태우 전 검찰 수사관이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기소됐다.

국민권익위에 따르면 지난해 공익신고나 부패신고를 했다가 신분공개 및 보복 등 불이익이 우려된다며 권익위에 보호를 요청한 건수는 124건에 달했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