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한국신용평가의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신평이 양사의 항공운임채권 자산유동화증권(ABS) 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낮춰서다. ABS의 신용등급이 일정 미만으로 내려가면 양사는 2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한꺼번에 떠안아야 할 수도 있다.항공운임채권 ABS는 항공사들의 미래 매출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이다. 미래에 안정적인 매출을 낼 것이란 전제하에 항공사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미래 매출을 기초자산으로 삼기 때문에 ABS 신용등급은 회사 자체 등급보다 2단계씩 높게 책정된다. 신용등급이 ‘BBB+’인 대한항공의 ABS 등급은 ‘A’, ‘BBB-’인 아시아나항공의 ABS 등급은 ‘BBB+’로 평가되는 식이다.문제는 양사 매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급격히 줄었다는 것이다. 이달 1~23일 국제선 노선 여객 수는 8만6514명. 코로나19 이전인 지난 1월(397만1285명)에 비해 98% 감소했다. 국제선 매출은 대한항공 전체 여객 매출의 94%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한신평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ABS 등급을 각각 ‘A-’, ‘BBB’로 낮춘 건 이 때문이다. 안정적인 수익을 낼 것으로 예상하고 돈을 빌린 것인데, 매출이 쪼그라들면서 돈을 제때 갚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 기준 대한항공의 ABS 발행잔액은 총 1조3200억원, 아시아나항공은 4688억원에 달한다. 신용등급이 더 내려가면 양사는 이 금액을 조기상환해야 한다.ABS 조기상환 트리거가 발동하면 여파는 항공업계를 넘어 금융권으로 퍼진다. 업계 관계자는 “현금 여력이 없는 항공사들이 ABS 상환을 하지 못할 경우 신용공여를 한 은행들이 채무를 떠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IBK기업은행은 아시아나항공 ABS 발행잔액 4688억원 중 3158억원에 대해 신용을 보강했다. 대한항공의 미주 노선 기반 ABS 4300억원은 신한·기업·KB국민·농협은행이 공여했다. 다만 산업은행이 이주 발표한 기간산업 지원책으로 양사는 한시름 덜게 됐다. 산은은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에 각각 1조 7000억원, 1조 2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대한항공에 투입되는 자금 중 7000억원은 화물 운송 관련 ABS를 인수하는 데 쓰인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적시에 긴급 유동성 지원 방안을 마련해준 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요즘 분위기라면 신용등급 강등에도 이혼 결정처럼 숙려 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한 베테랑 채권매니저의 말이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예전처럼 정량적 기준만으로 신용등급을 낮췄다가는 엄청난 후폭풍이 불지 않겠느냐”며 “신용평가사도 급격한 등급 조정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3대 신용평가 회사가 이달부터 상반기 정기 평가에 들어갔다. 400개 안팎 기업의 작년과 올해 1분기 실적을 비교하면서 신용등급을 재점검하는 작업이다. 코로나19 여파로 기업의 각종 부도 위험 지표가 오른 것을 감안하면 대규모 조정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신평사들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대상 기업 절반 이상의 등급을 무더기로 끌어내려 국내외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안긴 적이 있다.하지만 회사채 시장 참여자 사이에선 신평사들이 외환위기 직후처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1998년 대규모 등급 강등 이후 국내 신평사들은 외부 충격에 따른 등급 조정 작업에 신중한 모습을 보여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듬해 나이스신용평가는 등급 강등(30개)과 등급 상향(31개) 기업 수가 거의 같았다. 일시 충격이 왔다고 해서 곧바로 등급을 낮추지 않았다. 오히려 3대 신평사는 위기가 진정된 후인 2014~2015년이 돼서야 상당수 기업의 등급을 하향 조정했다.지난달 30일 대한항공이 발행한 자산유동화증권(ABS) 등급에서 신평사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나이스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는 지난해와 똑같이 ‘A’를 줬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담당자는 “올 들어 매출이 절반 이하로 급감한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너그러운 평가”라고 말했다. 당국의 ‘무언의 압박’도 부담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신평사들로부터 ‘신용등급 강등 조건(트리거)’ 자료를 걷어갔다. 강등 조건은 ‘부채비율 500% 초과’처럼 일정 기준에 들어오면 등급을 자동으로 낮추는 장치다. 시장 참여자들은 당국이 신평사들에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신평사들은 시장 안정을 크게 위협하지 않으면서 등급 체계의 신뢰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접점’을 찾으려 고민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증권사의 신용분석 애널리스트는 “신평사들이 현재의 상황이 이례적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강등 조건을 제한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마켓인사이트 2월 17일 오후 4시13분기업들이 ‘어닝쇼크(실적 충격)’ 수준의 지난해 4분기 실적을 줄줄이 내놓자 신용평가회사들의 신용등급 강등이 잇따르고 있다. 업종 간판기업들의 등급마저 속절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올해 실적 전망까지 어두워지면서 ‘등급 하락 도미노’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17일 신용평가업계에 따르면 나이스신용평가는 이마트와 LG디스플레이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AA-에서 A+로 한 단계씩 내렸다. 이마트의 등급이 떨어진 건 신세계에서 분할 출범한 2011년 이후 처음이다. LG디스플레이에는 ‘부정적’ 전망이 붙었다. 신용등급을 또 한 번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이마트는 지난해 2분기에 창사 이후 첫 적자(299억원)를 기록한 데 이어 4분기에도 10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LG디스플레이 역시 4분기에도 적자(4218억원)가 쌓여 지난해 1조359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실적 한파에 코로나19 사태 여파가 겹쳐 기업 등급 하락이 줄을 이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현재 국내 신용평가사가 신용등급에 부정적 전망을 붙였거나 등급 하향을 검토 중인 기업은 22곳에 달한다. 김은기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주요 상장사의 실적 발표가 마무리되는 다음달부터 부정적인 전망을 단 기업들의 등급 하락이 쏟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상장사 절반 '어닝쇼크'커지는 '신용 강등' 공포국내 상장사 절반이 작년 4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까지 겹쳐 올해 실적 전망도 하향 조정 추세다. 기업들의 무더기 등급 강등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17일 시장정보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주까지 4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한 기업의 46%가 어닝쇼크를 기록했다. 시장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가 있는 182곳 중 83곳이 컨센서스 대비 10% 이상 적은 영업이익을 발표했다(컨센서스 대비 적자 전환 14곳 포함). 10% 이상 많은 이익을 발표한 ‘어닝 서프라이즈’ 기업은 42곳(흑자 전환 1곳 포함)이었다. 나머지는 추정치와 비슷한 실적을 냈다.어닝쇼크 기업 가운데 일부는 곧바로 등급이 강등됐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이마트와 LG디스플레이의 등급을 떨어뜨렸다. 태양광 업체인 OCI는 강등 직전에 내몰렸다. 한국기업평가는 OCI가 지난해 순손실 8093억원을 냈다고 공시하자마자 이 회사를 신용등급(A+) 하향 검토 대상에 올렸다. 신용등급 하락은 기업의 신인도 악화와 자금조달 비용 상승으로 이어진다.올해 1분기 실적 전망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에프앤가이드 컨센서스가 존재하는 135곳의 1분기 추정 영업이익은 총 19조7284억원으로, 한 달 전 21조6687억원 대비 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사태는 기업들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무디스는 최근 코로나19 파장이 한국 기업의 신용도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잇따라 경고했다.이날 S&P는 “KCC가 국내 주택시장 둔화로 어려운 영업환경에 처해 있다”며 이 회사의 장기 신용등급을 ‘BBB-'에서 ‘BB+'로 하향 조정했다.김진성/이태호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