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 플렉스 해볼까…긴급재난지원금 어떻게 쓰나
‘확찐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에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살이 급격히 찐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지난 13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이 시작되자 ‘2차 확찐자’가 속출하고 있다. 배달음식 때문이다.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는 박 대리는 최근 배달음식 소비가 부쩍 늘었다. 그는 “지원금을 기한 내 사용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틀에 한 번꼴로 야식을 시켜 먹는다”며 “헬스장도 휴업해 몸무게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다만 내수 촉진과 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사용처와 기한이 정해져 있다. 이 때문에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람 중에는 기부를 고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김과장 이대리들은 갑작스럽게 신용카드에 ‘꽂힌’ 긴급재난지원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한우 플렉스’로 코로나 우울증 날려볼까

어버이날 닷새 뒤 지급이 시작된 만큼 긴급재난지원금은 부모님을 위한 ‘긴급효도지원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코로나19 여파로 무급휴직 중인 국내 저비용항공사(LCC) 승무원 이모씨는 작년 말 자취를 시작한 1인 가구다. 4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씨는 “부모님과 오랜만에 식사하려고 집 근처 한정식집을 예약했다”며 “재난지원금 덕에 뒤늦게라도 어버이날을 챙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안경 바꾸기, 치과 진료 등 목돈이 들어가거나 한우 등 비싼 식재료 소비에 사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우 플렉스(flex: 과시적 소비를 일컫는 신조어)’에 한우 가격도 고공행진 중이다. 미국산 소고기 공급은 줄었는데 ‘공돈’으로 평소 쉽사리 장바구니에 담지 못했던 한우를 맛보려는 소비자는 늘었기 때문이다. 긴급재난지원금으로 본가와 처가에 한우 선물세트를 선물한 신 대리는 “잘 먹어야 면역력도 생기지 않겠느냐”며 “가족들끼리 평소 선뜻 사기 힘든 한우를 원 없이 먹었다”고 했다.

은행에 근무 중인 최 과장은 긴급재난지원금을 말 그대로 ‘재난 대비’에 썼다. 휴지, 세제 등 생활 필수품부터 마스크와 구급키트까지 집에 쟁여뒀다. 최 과장은 “언제 또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으로 ‘집콕’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며 “아이들과 함께 재난물품 목록을 적다 보니 안전교육 효과도 있었다”고 했다.

담배 사재기를 택한 이들도 있다. 대기업 영업직에 종사하는 30대 흡연자 김 대리는 긴급재난지원금 40만원을 모두 담배 구입에 썼다. 그는 “나홀로 가구여서 자취집에 전자레인지도 없을 정도로 집밥을 먹지 않는 데다 야근과 주말 근무도 잦아 오프라인 쇼핑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며 “내가 좋아하는 담배를 쟁여놨다”고 말했다.

부부·부모 자식 간 신경전도

긴급재난지원금은 세대주가 대표로 신청해 받는다. 세대주 혼자 사용처를 결정했다가 뒤늦게 이를 알게 된 가족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건설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최 과장은 최근 “동생이 미뤄뒀던 치과 치료를 받는데 긴급재난지원금을 좀 보태주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가족을 대표해서 받았을 뿐 혼자 쓰는 돈이 아닌데 왜 일방적으로 통보하느냐”는 싸늘한 답이 돌아왔다.

긴급재난지원금을 한 방에 소진해 스트레스를 날리려는 ‘올인(all-in)파’와 3개월간 알뜰살뜰 쪼개 쓰려는 ‘분산파’ 간의 기싸움도 한창이다. 식품업체에 재직 중인 손 과장은 “이참에 낡은 소파를 바꾸자”고 했지만, 동생은 “틈틈이 생활 필수품을 사는 데 쓰자”고 주장했다. 의견이 갈려 손 과장의 신용카드에 충전된 60만원을 한 푼도 쓰지 못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을 어떻게 쓸지 약식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하기도 한다. 건설업체에서 일하는 이 대리는 최근 가족회의를 통해 100만원의 긴급재난지원금을 모두 기부하기로 했다. 그는 “돈이 아쉽긴 하지만 네 식구가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도 아니어서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자발적 기부(?)’ 은근 압박도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부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리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정부는 당초 소득하위 70%에게만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여당과의 논쟁 끝에 전 국민 지급으로 방침을 바꿨다. 대신 상위 30%를 비롯한 국민들의 자발적 기부를 기대했다.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특히 기부 압박을 호소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부를 선언한 것이 신호탄이 됐다. 기재부는 홍 부총리의 기부 선언 다음날 과장급 이상 ‘자발적 기부’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과장들을 한자리에 모은 뒤 “기부하지 않을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식으로 의사를 확인해 사실상 기부를 유도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재부에 이어 고용노동부도 과장급 이상 기부 참여를 선언하자 다른 부처들은 눈치만 보고 있다. 또 다른 경제부처 과장은 “일자리 타격이 작은 공무원들이 기부에 나서야 한다는 데는 공감한다”면서도 “재난지원금을 이미 받아 써버린 동료들은 속을 끓이고 있다”고 했다.

공공기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농협중앙회는 당사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임원과 간부 5000명의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논란이 불거지자 ‘강제성이 없는 캠페인’이라고 해명했다.

긴급재난지원금 기부가 민간 기업으로 확산하면서 은연중에 기부를 압박하는 회사와 지원금을 기대하는 가족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메리츠금융그룹은 개별 직원의 동의 없이 노동조합과의 합의만으로 전 직원의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해 논란이 일었다. 이 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한 대리는 “꼭 필요한 사람은 회사에 얘기해 기부를 피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내게 지급된 돈을 어떻게 쓸지 회사가 먼저 결정해버린 셈”이라고 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는 ‘왜 3분의 1도 아니고 전체를 기부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다”며 “나도 회사 결정이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가족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느냐”고 고민을 토로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