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E그룹 신대용 회장 "폭탄 제조에 쓴 힘 통일 위해 바칠 것"
‘신대용’이란 이름이 미국 방위산업계에 회자된 건 1991년 걸프전 때였다. 그가 이끄는 DSE그룹은 당시 미 국방부와 공동으로 ‘벙커버스터(지하에 있는 적 수뇌부 벙커를 파괴하는 대형 관통 폭탄)’의 두뇌격인 중앙제어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신대용 회장(사진)은 미군에 1조원이 넘는 첨단 군수물품을 공급하면서 미 정계와 군에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신 회장이 지난 27일 방한했다. 방위산업체의 ‘오너’가 아니라 통일한국세움재단 이사장으로서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 에하드세미나에 특별강연자로 나섰다. 사단법인 통일한국세움재단은 신 이사장을 비롯한 독지가 7명의 도움을 받아 숭실대가 설립한 민간 통일재단이다.

이날 강연에서 신 이사장은 “조국을 떠난 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갈라진 한반도의 현실에 늘 마음이 아프다”며 “남은 생은 통일을 위한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성공하려면 미국 정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비핵화의 시간표를 놓고 한·미 간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신 이사장의 조언은 간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에 ‘고맙다’는 말을 자주 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한 일 같지만 미국이 전통적 우방으로서 한국을 도와줬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전달해야 한다”며 “미국은 외교무대에서 특히 ‘기억’을 귀히 여기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기업인 신대용’이 통일 전도사로 변신한 건 6년 전 뇌질환으로 쓰러져 뇌수술을 받은 뒤부터다. 그전까지만 해도 기업 경영에만 전념했다. 가난과 고문이 싫어 떠난 조국에 대해선 아무런 연민이 없었다.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던 그는 박정희 정부 시절 공안사건에 연루돼 쫓기듯 미국으로 건너갔다. 도미 이후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살았다. 이후 자동차부품, 방산업체 등을 차례로 인수해 DSE그룹을 일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크리스천으로 살게 된 그는 회사일에서 조금씩 손을 떼는 대신 삶의 보람을 느낄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어느 날 북한 영유아와 노인을 돕는 한국인 선교사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제 휴대폰 번호는 기밀이어서 외부인과 단번에 연결되는 일은 좀체 없는데 정말 신기한 일이었죠. 그때부터 북한 주민을 위한 인도적 지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땐 일본인으로, 해방 후엔 한국인으로, 미국에 가선 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6·25전쟁도 직접 겪었고요. 우리 미래 세대에 그런 불행이 이어지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기다리며 뛰겠습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