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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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네 살의 직장인 김 모씨는 2016년 6월16일, H저축은행과 J저축은행에 각각 3000만원과 2000만원의 대출을 신청했다. H저축은행 담당 직원은 돈을 빌려주기에 앞서 전화로 “다른 금융회사에서도 대출 신청한 사실이 있냐”고 물었다. 김씨는 “없다”고 거짓말을 말했다.

김씨는 H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반년 뒤 프리워크아웃(연체이자 감면 등 채무조정제도)을 했다. 검찰은 김씨가 H저축은행에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기를 쳤다며 기소를 했다.

1심과 2심은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사기죄를 저질렀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김씨를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다. 사기죄를 다루는 형법 제347조는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대법원은 “H저축은행이 김씨의 사정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대출을 해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신의와 성실의 의무를 저버려 사기죄의 요건이 된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H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린 뒤 6개월만에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해 약정한 이자를 물지 않아도 됐고 H저축은행은 그만큼 손해를 봤다.

H저축은행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결이라고 하겠지만 1심과 2심은 왜 김씨의 손을 들어줬을까.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의 1심 판사는 돈을 빌린 당시에 대출금을 갚을 의사와 능력이 있었다면 차용금을 변제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민사상 채무불이행은 되겠지만 형사상 사기죄가 성립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1심은 ‘김씨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일반 상거래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일로 봤다. “일반 상거래에서 과장을 하는 것은 대등한 정보력과 교섭력을 가진 상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우월한 정보력을 가진 기업이 그렇지 못한 일반 소비자를 상대로 상품의 선전, 광고를 할 때도 일정 정도에서는 허용돼 기망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다”며 “신용상태가 좋지 못하거나 변제자력이 부족한 개인이 금융회사를 상대로 대출을 신청하면서 자신의 신용상태를 과장해 알린다고 해도 금융회사가 이를 마땅히 검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거래를 하면서 약간씩 거짓말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고 과도하지 않으면 사기죄로 처벌되지 않는데 ‘김씨의 거짓말’은 사기죄를 구성할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1심은 저축은행의 본업(本業)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저축은행은 돈을 떼일 우려가 높은 저신용자들을 상대로 높은 이자를 받는 영업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출신청인의 신용상태를 엄격하게 따져야할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대출금을 떼 먹겠다는 의도가 명확하거나 대출 관련 자료를 허위로 제출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축은행에 대한 편취의 범위를 쉽게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게 1심의 판단이었다. 김씨의 거짓말만으로는 대출금을 편취하겠다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다른 금융회사에 대출신청을 했다는 것 외에는 허위사실을 H저축은행에 전하지 않았다.

또한 H저축은행이 재판에 이겼을 때 사회적 파급효과도 우려했다. 판결문은 “고객이 양호한 신용상태로 보이기 위해 일부 사실이 아닌 진술을 했다고 해서 바로 기망을 구성할 수 있다고 하면 금융회사가 부담해야할 거래비용을 형사사법체계와 개인에게 전환하는 결과가 돼 부당하다”고 적었다.

김씨는 대출알선업자를 통해 대부업체 등에서 빌린 고금리 대출 약 7000만원을 갚고 신용상태를 좋게 한 뒤 비교적 금리가 낮은 대출로 갈아타는 ‘통대환’을 시도했다가 끝내 신용회복위원회에 1억1500여만원의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프리워크아웃은 원금을 탕감해주지는 않는다.

1심은 추후에 프리워크아웃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는 H저축은행의 본래 이자를 떼 먹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봤다. 1심은 “불법 대출알선업자들이 제시하는 대로 대출을 받았다고 해도 바로 편취 의사를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당시 연봉 5400만원이었고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며 30만~40만원의 생활비만 쓰면서 대출금을 모두 갚을 의지와 능력이 있었다 일관되게 이야기했다.

1심은 H저축은행 상담원이 질문한 내용도 문제 삼았다. “건전한 채무상환을 위해 당행은 대출 승인 후에도 송금 전에 신용재조회를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저희 쪽 외에 타 금융사 대출 확인되시면 당해 대출은 불가능할 수 있음을 말씀드린다”는 내용은 대출이 안 될 수 있다는 취지일뿐 김씨가 장래의 대출계획을 적극적으로 고지할 의무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H저축은행은 다른 질문으로 ‘통대출’ 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고 다른 금융기관으로부터 신용조회가 있는지 여부를 따져보거나 대출계약일과 집행일을 달리할 수도 있었는데 이런 작업을 하지 않은 것도 김씨에게 유리한 정황이었다.

여기에 “J저축은행은 H저축은행이 김씨에게 대출을 해 준 뒤, 같은 날 2000만원을 빌려줬다”며 “피고인이 H저축은행에게 J저축은행에 2000만원의 대출 신청을 했다는 사실을 알렸더라도 대출 승인이 날 가능성이 있다”고 적시했다. 저축은행업계의 영업 행태를 볼 때 ‘김씨의 거짓말’이 대출 결정 단계에서 결정적인 변수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부산지방법원(2심)은 별다른 설명없이 1심 판결을 수용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기죄의 요건인 기망은 중요 부분에서 관한 허위표시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착오에 빠뜨려 행위자가 희망하는 재산적 처분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한 판단의 기초가 되는 사실에 관한 것이면 충분하다”며 “거래의 상대방이 일정한 사정에 관한 고지를 받았더라면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신의성실의 원칙상 상대방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의 증거에 따르면 월 230만원의 급여와 한 해 1500만원의 성과급을 받는 사람이 한 달에 180만원을 원리금으로 갚아야할 처지였고 추가로 대출을 얻으면서 ‘거짓말’을 했다”며 “피고인은 H저축은행에서 대출을 얻었을 때 60개월 동안 매월 92만원 이상을 납부해야 했는데 상환이 불가능한 채무를 부담하게 됐다”고 판단했다.

이어 “다른 금융회사에 동시에 진행 중인 대출이 있는지 여부를 허위로 고지했고, H저축은행이 제대로된 고지를 받았더라면 대출을 해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며 “대출일부터 6개월 후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한 점과 경위를 종합하면 편취의 고의가 인정된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 판결에 따라 2심은 유죄 가능성이 큰 판결을 다시 내려야 한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