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혼란' 불 질러놓고 뒤로 숨는 김명수
김명수 대법원장은 4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대법관들로부터) 걱정을 들었는데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진심이라면 사법부를 둘러싼 지금의 대혼란은 원인무효다. 대법관들은 누군가의 입맛에 맞춘 판결을 내리기가 불가능한 구조라고 강조한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와 같은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행정부와 ‘재판 거래’를 했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김 대법원장이 대법관들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말도 안 되는 논란으로 사법부 신뢰가 추락한 셈이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어찌 된 일인지 판사들의 여론을 들어보겠다는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을 비롯한 각급 법원의 판사회의가 잇따르고 오는 11일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까지 열리는데도 제지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를 무겁게 들어보겠다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회의는 필연적으로 소모적 논란을 일으키고 사법부의 신뢰를 떨어뜨릴 것인데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자세다. 자신의 임기 중에 진행된 조사를 포함한 세 차례 조사의 공통점은 검찰 수사를 필요로 하는 불법 행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날 열린 단독판사회의에서는 사법권 남용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또다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더 나아가 사법권 남용과 관련한 재판에서 엄정하게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왔다.

대법관 출신 한 변호사는 “적어도 판사라면 철저하게 증거를 따져서 결론을 내야 할 텐데 어떤 근거로 검찰 수사까지 운운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판사들조차 여론몰이식 선동에 나서면 누가 한국 사회의 중심을 잡아줄 것인가”라고 개탄했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도 “대법원의 의사결정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 대법원장이 행정부와 거래가 가능했다는 전제 아래 이뤄지는 논의를 두고 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판사로 근무하면서 지켜온 소신과 자존심을 버리고 대법원장의 부탁만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판결을 해준다는 게 말이 되냐”고 되묻기도 했다. 법원행정처가 대법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법조계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야기라고 일축하는 고위 판사도 많았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한 조사에서도 재판 거래 의혹을 제기한 판결 13건 가운데 5건은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거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대법원이 2심 판결을 뒤집어야 하는데 이런 경향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조계는 김 대법원장이 이제라도 사법부 안정을 위해 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법원행정처와 대법관들이 모의해서 행정부와 재판 거래를 했다고 판단하면 환부를 과감히 도려내는 수술을 하든지, 별일 아닌 것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생각이라면 판사들을 차분히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 행동은 일선 판사와 함께하겠다는 식이라면 ‘쑥대밭’으로 변한 사법부가 언제 다시 신뢰를 회복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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