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식품업체 강 과장(남)은 최근 근무시간에 틈을 내 ‘성희롱 예방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다. 예전에는 설렁설렁 받았다. 교육 시간에 후배를 대참시키거나 동영상도 대충 건너뛰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젠 180도 달라졌다. 전방위로 터져나오는 성희롱, 성추행 사례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실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과장&이대리] 저녁 9시 안에 회식 끝~택시는 각자도생!… 엘리베이터선 '투탕카멘 자세' 추천해요~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은 예술·문화계만의 일은 아니다. 남성 위주인 데다 상하관계가 엄격한 일반 직장 내에서도 상당수의 여성이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속앓이를 해왔다. 최근 달라지는 분위기에 이들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며 하나둘씩 미투에 동참하고 있다. 기업들은 괜한 구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회식금지령’ ‘택시동승 금지령’ 등을 내리고 있다. 미투 열풍 이후 달라진 사내 분위기를 김과장 이대리들에게 들어봤다.

“이젠 못 참아”…이 대리도 ‘미투’

국책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고모씨(30)는 치근덕거리는 유부남 상사 임모씨(44)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임씨는 야근하는 고씨를 밤늦게 기다렸다가 종종 집까지 데려다준다. 처음엔 단순한 호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업무를 일찌감치 끝낸 임씨가 밤 11시까지 기다리는 일이 반복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업무 시간 중 느닷없이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메시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단둘이 식사하자는 제안도 여러 차례 받았다. 참다못해 불편하다고 솔직히 이야기하자 임씨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사사건건 고씨를 못살게 굴었다. 주변에 ‘고씨가 잘난 척을 한다’ ‘업무 태도가 불성실하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한 생활용품 기업에 다니는 김 대리(33)도 그동안 각종 성희롱을 경험했다. 회식 자리에서 여성 동기들의 외모를 평가하며 순위를 매긴 과장, 밤늦게 걸려온 전화에 “지금은 통화하기 곤란하다”고 답했더니 “왜? 남자랑 뭐해?”라고 되물었던 부장 등 셀 수도 없다. 김 대리는 “최근 회사에서 미투 사례를 조사하고 있는데 이참에 고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 프랜차이즈 외식업체에 근무하는 박모씨(30·남)는 여자 후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성추행을 했다는 구설에 휘말려 지난달 정직처분됐다. 후배 최모씨(23)에게 복장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주무르는 듯한 행동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이 사건을 담당한 인사팀 김모씨는 “박씨가 다른 주장을 했고 진실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지만 본사에서 빠른 처분을 지시했다”며 “빨리 사건을 잠재우려는 분위기 때문에 선의의 피해자도 생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여직원 대부분은 쉽사리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소연한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이 대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블라인드 사내 게시판에 글을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피해사실을 고발하고 싶지만, 공론화된 뒤 회사에 번질 파장이 두려워서다. 한 임원이 “블라인드 같은 곳에 미투 운동한답시고 쓸데없는 글이 올라오는지 예의주시하라”고 했다는 말도 들린다. “할 말은 많지만 피해사실을 고발했다가 나중에 신상만 밝혀지고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게 아닐지 고민이 되네요.”

회식 자제하고 택시는 따로

성추행, 성희롱 폭로가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질 것을 우려해 회식 금지 및 성평등 교육 의무화 등의 조치를 내놓는 회사들이 늘었다. 분위기가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중소기업들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한 중견 가구회사에 다니는 한 과장은 “작년에 같은 업계의 한 회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고 난 뒤 회사에서 오후 9시 이후 회식을 아예 금지했다”며 “원칙적으로 6시였던 퇴근시간도 1시간 당겼고 5시가 넘으면 임원들이 내려와 ‘빨리 퇴근하라’고 독촉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는 가구업계 분위기가 수직적이고 폐쇄적이었다”며 “부랴부랴 조직문화 쇄신에 나서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변하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했다.

중장비업체 A사는 남녀 사내 직원 둘이서 저녁자리를 하는 것을 최근 금지했다. 회사 차원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막아보자는 취지다. 공식적으로 공지문을 띄우면 외부로 새어나갈지도 모른다며 부서별로 부서장들이 구두 지시를 내렸다.

중소 식품업체 B사도 대기업의 모범사례를 벤치마킹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회식자리에 ‘안전지킴이’ 역할을 하는 직원을 한 명씩 배치해 감시하게 하는 제도다. 오후 9시 이후로 회식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남녀 직원이 함께 택시를 타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10대 그룹에 속하는 C사는 공장에서 남녀 직원이 함께 회식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후배 걱정도 못 하나…각종 부작용도

상당수 젊은 남자 직원들은 난감할 때가 많다. 증권사 직원 김 대리(33)는 분개하는 또래 여자 동료들과 성희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남자 상사들 사이에 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미투 열풍이 분 이후 식사 자리의 주된 대화 주제는 ‘사내 성희롱 상사’다. 듣다 보면 “정말 심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가끔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문제가 되나’ 싶은 것도 있다고 한다.

남자 상사들과 식사할 땐 반대다. 동료 여직원에 대한 험담을 듣다 보면 거북할 때도 적지 않다. 김 대리는 “점심 시간에까지 서로 욕하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요즘엔 되도록 친구들하고 밥을 먹는다”고 했다. 한 유통대기업에 다니는 정 차장도 회사 생활하는 데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늘었다고 호소했다. 회식하면 남자직원과 여자직원이 ‘미팅 대열’로 마주보고 앉는다. 회사에서도 여직원과 가까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남자직원들은 양손을 어깨쪽으로 교차시키는 소위 ‘투탕카멘 자세’를 취한다. 워낙 알아서 조심하려는 분위기이다 보니 각종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다.

정 차장은 “원래는 여직원들과 집방향이 같으면 데려다주고 잘 가는지 확인도 했다”며 “이제는 연공서열 순서대로 따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잘 가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자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잘못된 문화는 바로 잡아야 하지만 선배가 후배를 챙겨주던 따뜻한 문화나 남녀직원 간의 자연스러운 교류까지 줄어드는 건 문제 아닐까요?”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