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경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한국의 장기통계' 발간을 주도했다. / 사진=최혁 기자
낙성대경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한국의 장기통계' 발간을 주도했다. / 사진=최혁 기자
일반론적 관점에서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사진)는 정체성이 헷갈리는 학자다. 애매모호한 중립지대에 서 있다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사안마다 색깔이 확확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그가 2009년부터 소장을 맡고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는 뉴라이트의 본원 같은 곳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학술기지란 평가도 받아왔다. 안병직·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 전위에 있다. 김 교수 스스로 일제시대에 경제성장이 이뤄졌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에도 이름을 올렸다. 영락없는 보수색 연구자의 면모다.

그런 그를 보색(반대색)으로 덧칠한 것은 소득분배 연구다. ‘성장=보수 대 분배=진보’ 도식에서 이러한 소득불평등-분배형평성 패키지는 통상 진보 진영의 관심사에 속했다. 단순한 보수색 학자로 치부하기엔 이질적 행보였던 셈이다. 김 교수는 토마 피케티의 방법론으로 국내 실태를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상위 1~10% 소득집중도, 시계열적 추세 등을 실증했다.

- 정체가 궁금하다고들 하지 않나.

“그런 것 없다. 저는 연구자다. 어떤 지향을 밝히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해 말하려 한다.”

- 그동안 사안별로 입장이 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건 없다. 장기 시계열과 국제비교가 주된 관심사다.”

- 소득불평등 연구와 국정교과서 집필의 ‘간극’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일제시대에도 경제성장 했다고 말하면 보수, 소득분배 문제를 다루면 진보 식으로 바라보는데 통계를 토대로 연구했을 뿐이다. 국정교과서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 경제사 연구자로서 교과서의 문제 있는 부분은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참여한 것이다.”

- 어떤 부분이 잘못됐다는 건지?

“예를 들어 일제시대 경제성장이 이뤄졌다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과 일제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혼동해선 곤란하다. 일제 때 인구, 평균 수명, 교통 인프라 등이 늘어났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다. 일본은 조선을 한 나라로 만들려 했지 않나(내선일체). 서구의 식민지배와 달리 한반도를 성장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지난 14일 한경닷컴과 인터뷰한 김 교수는 "한국의 성장 스토리를 뒷받침할 통계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반복 강조했다. / 사진=최혁 기자
지난 14일 한경닷컴과 인터뷰한 김 교수는 "한국의 성장 스토리를 뒷받침할 통계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반복 강조했다. / 사진=최혁 기자
‘그게 바로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 아닌가’ 퍼뜩 생각이 들던 참에 김 교수가 덧붙였다. “통계가 입증한다.” 국가간 경계를 허물어 자유로운 왕래와 경제활동이 가능한 유럽연합(EU)의 사례를 들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간명한 사실이라고도 했다. 차원이 다른 사안을 섞지 말자는 얘기로 들렸다. 그는 “일제는 우리 의지에 반해 주권을 유린했고 자유를 구속했다. 그 자체로 일제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충분히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김 교수가 천착하는 것은 통계다. 주장을 하기에 앞서 전모를 밝히는 쪽에 치중해왔다. 안병직·이영훈 교수와 달리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다. 연구자로서 그의 입장을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듯했다. ‘주장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근거는 통계 수치로 구성된다.’

그 결과물이 김 교수를 필두로 한 낙성대경제연구소 멤버들이 20여년 공동작업 끝에 펴낸 하드커버 두 권 분량 〈한국의 장기통계〉다.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22개 분야 1만여 항목의 연도별 통계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통시성(장기 시계열)과 공시성(국제비교)을 갖춘 데이터 기반 연구 인프라. 지난 14일 동국대 만해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이 작업의 중요성을 되풀이 강조했다.

- 〈한국의 장기통계〉 발간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 사회과학이 남의 논문을 잘 안 본다. 게을러서거나 관심의 폭이 좁아서일 수도 있는데, 큰 이유 중 하나가 통계라는 진입장벽 때문이다. 임금상승률을 예로 들어보자. 관련 통계가 여러 개 있다. 임금 수준, 증가율 비교 등 활용해야 하는 자료가 모두 다를 뿐 아니라 과거로 올라가면 자료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 이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

그는 책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연구자들도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서 원하는 통계를 찾아 적절히 이용하기 쉽지 않다. (중략) 우리나라는 특히 시기별로 자료 상황의 차이가 큰데, 그것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이러한 장벽을 낮춰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장기통계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다. (중략) 나아가 장기통계의 정비는 각국의 발전 경로 전체를 비교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국제비교의 지평이 그만큼 넓어진다. 이를 통해 한국사나 사회과학의 각 분야에서 한국사회가 지난 1세기에 걸쳐 어떻게 변해왔고, 외국과는 어떻게 다르며, 그러한 요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수량적 연구가 촉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장기통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뭐냐.

“우리의 경제사를 궁금해하는 나라가 많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경험에다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급성장한 극적 스토리가 있는 나라 아니냐. 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물어오면 설명할 만한 ‘콘텐츠’가 마땅찮다. 왜 그렇겠나.”

- 통계의 공백?

“역사를 스토리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수량사(史)’가 뒷받침돼야 한다. 각 지표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비교·분석 가능해야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 ‘한강의 기적’을 “하면 된다”로만 설명하긴 어려우니(웃음).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맞기 전 세계적 주목을 받을 때, 무엇이 일본을 성공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해한 연구자들이 많았다. 도대체 일본 시스템은 미국 시스템과 뭐가 다르길래? 세계적으로 일본학 붐이 일어났다. 일본이 구축한 장기통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대해 "일제시대 경제성장이 이뤄졌다는 사실과 식민지배 비판은 별개 문제"라고 짚었다. / 사진=최혁 기자
김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대해 "일제시대 경제성장이 이뤄졌다는 사실과 식민지배 비판은 별개 문제"라고 짚었다. / 사진=최혁 기자
그가 언급한 장기통계는 일본 히토쓰바시대에서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1960년대부터 세금으로 국립 히토쓰바시대를 지원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일본학 연구의 통계적 기초가 된 것이다. 김 교수는 도쿄대 유학 시절 이 통계를 처음 접했다. ‘자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연구 풍토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느꼈다고. 사실 그간 국내의 일제시대 경제사 연구 역시 히토쓰바시대 경제연구소가 1988년 펴낸 ‘구(舊) 일본 식민지 경제통계’를 이용해왔다.

- 그럴 필요가 있다는 거구나.

“통계 기반 연구를 축적해야 세계로 발신할 수 있다. 외국 학자들이 한국을 연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경제사에서 영국 연구는 압도적으로 많다.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니까. 미국 연구는 최강국이니 당연히 많고, 일본도 당시 저성장 늪에 빠지지 않는 선진국으로 연구 대상이 됐다. 한국도 충분히 가능하다.”

- 한류도 좋지만, 한국을 연구하게 해야 한다!

“일본도 비서구 국가지만 개발도상국의 눈으로 보면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제국’이었다. 뒤따라가는 입장에서 참고할 만한 모델은 아니다. 반면 한국은 롤모델이 된다. 식민지와 6·25 직후 최빈국 시절을 지나 압축성장에 성공한 스토리는 잠재 수요가 높다. 이런 스토리를 어떻게 드러내 발신할 것이냐를 정부가 고민하고 지원해야 하는 거다.”

- 정리하면 일본 통계에서의 독립, 해외 연구자에 대한 발신.

“그래야 보편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진정한 문화강국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한국의 장기통계〉 영문판도 준비 중이다.”

- 딱 봐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을 텐데.

“우리가 우리 걸 떠받든다고 해서 국제적·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관심에 따라 연구할 수 있고, 자기네 것과도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시기와 지역의 제약을 넘어 국제비교가 가능하게끔 항목을 만들어 통계 인프라를 깔아야 한다. 그 나라의 사회과학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항목들을 비교·수정하는 작업을 수없이 거쳤다. 20명 이상이 공동 작업했는데 각 통계가 상호 연관돼 있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통계도 모두 바꿔야 했다. 그래서 20년 정도 걸린 거지(웃음).”

- 후속 연구가 궁금하다.

“이번에 펴낸 전국 통계를 시·군 단위까지 세분화해 확장하는 작업을 하려 한다. 그런데 연구비 수주 심사 통과가 쉽지 않다. 몇몇 지자체 데이터가 없어 이빨이 빠지는 걸 문제 삼는데, 200개 지자체 가운데 150곳만 시계열 자료를 구축해도 의미 있지 않겠나.”

- 지방소멸 시대에 필요한 연구로 보이는데….

“지방자치와 맞물려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자치를 구호로만 할 것이냐. 지자체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지자체간 비교도, 경쟁도 해야 한다. 그걸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 통계다. 저도 아쉽다.”

[김봉구의 소수의견]은 통념이나 대세와 거리가 있더라도 일리 있는 주장, 되새겨볼 만한 의견을 소개하는 기획인터뷰입니다. 우리사회의 다양한 작은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