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독립운동가 박열
1923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열은 당당했다. 조사 과정에서 일왕과 태자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순순히 밝혔다. 그리고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말 것,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힐 것, 조선어 사용 등 네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조선 전통 복장을 하고 법정에 나온 박열은 반말투로 답변하는가 하면, 일왕의 죄를 폭로하는 글을 낭독하며 재판장에 있던 일본인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1926년 3월 사형이 선고되자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다. 1주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독립운동 역사상 최장인 22년 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45년 10월27일 석방됐을 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박열은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세 의사의 유해 송환 책임을 맡았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그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해 10월에는 재일 한국인을 위한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단(민단)을 발족하고 초대 단장을 맡았다.

1949년 한국에 영구 귀국했으나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내가 그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잔류했다가 납북됐다.

독립운동가 박열이 태어난 날이 1902년 2월3일이다. 한국 정부는 1989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