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 여성 5만∼7만…위자료 배상 소송 잇따라

"돈도 벌게 해주고 중학교에도 보내주겠다는 속아 일본에 갔지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종일 일해도 돌아오는 건 욕설과 발길질뿐이었습니다."
"돈도 벌고 중학교 보내준단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 소녀들의 恨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는 식민지인 조선에서 군수물자와 노동력을 징발하면서 일부 조직에 '정신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뒤 남성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하자 여성들을 징발하기 시작했으며 1944년 '여자정신 근로령'을 시행하면서 당시 국민학교 6학년 및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모집이 이뤄졌다.

징집당한 12∼40세의 조선 여성들은 일본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제조하거나 중국·인도·타이·버마·인도네시아 등 전쟁 발발 지역으로 끌려가 낮에는 탄약운반·취사·간호 노역을 하고 밤에는 위안부로 혹사당했다.

군수공장, 탄광 등에서 노역하던 조선인들은 '근로정신대'로, 일본군으로부터 성노예 피해를 본 조선인들은 '정신대'로 불렸다.

조선에서 붙잡혀 온 여성 중 상당수는 10대 초중반의 어린 소녀들이었으며 근로정신대 중 여성들은 별도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분류됐다.

일제에 강제동원 피해를 본 조선인 여성은 5만∼7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국내에서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와 후지코시 등을 상대로 한 14건(남·녀 포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 중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소송을 지원하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동원된 피해자는 광주·전남 150여명, 대전·충남 150여명 등 300여명으로 파악된다.

후지코시강재는 13∼16세 소녀 1천89명을 근로정신대로 동원해 중노동을 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1944년 5월 광주와 전남 목포·나주·순천·여수, 충남에서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 300여명은 공습 위험 속에 월급 한 푼 받지 못 하고 혹사당했다.

이들 중 6명은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 소녀가 화상 등 부상을 입었다.

1999년 3월 양금덕(86) 할머니 등 8명은 일본 내 지원단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도움을 받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지만 10년 만인 2008년 도쿄 최고재판소가 최종 기각 판결했다.

이후 2009년 3월 결성된 시민모임 관계자들이 일본 후생노동성을 상대로 후생연금(국민연금) 탈퇴수당 지급을 요청했으나 일본정부는 2009년 99엔을 지급했다.

2012년 5월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우리나라 대법원이 최초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관련 소송이 잇따르기 시작했다.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됐지만, 국가가 아닌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판결 내용에 힘입어 양금덕 할머니 등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5명이 2012년 10월 1차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고 2차 4명, 3차 2명 등 총 11명이 3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1차 소송은 2015년 6월 광주고법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뒤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광주지법 민사1단독(김현정 부장판사)는 8일 3차 소송 원고인 김영옥(85) 할머니와 최정례(1927년 출생·1944년 사망) 할머니의 조카며느리 이경자(74) 할머니가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미쓰비시가 생존자인 김 할머니에게 1억2천만원, 사망한 최 할머니의 유족에게는 상속분에 근거해 기준금 1억5천만원 중 325만6천684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도록 했다.

2차 소송 1심 선고는 오는 11일 열릴 예정이다.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areu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