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의 폭력에 맞선 역적…서민들 숨통을 틔우다
이탈리아 철학가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을 통해 체제의 폭력성과 박탈당한 인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장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죽여도 처벌받지는 않지만 이를 희생물로 바치는 건 금지된 대상이다. 이는 사회적·정치적 정체성도 없는 존재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체제에서 벗어난 가장 숭고한 존재이기도 하다.

MBC 월화드라마 ‘역적, 백성의 마음을 훔친 도적’(역적)의 아모개(김상중 분)가 바로 이 호모 사케르다. 그의 신분은 대대로 종으로 사는 씨종이다. 존재는 하지만 아무런 주권이 없는 생명체다. 자신과 식솔의 생살여탈권을 주인인 조참봉(손종학 분)이 갖고 있고, 주인 허락이 없으면 자식의 이름조차 지을 수 없다. 주인 대신 매를 맞거나 주인의 기분에 따라 희생당해도 누구 하나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저 주인에게 순종하고 사는 길만이 최선인 아모개의 삶에 변수가 생긴 것은 둘째 아들 길동(아역 이로운, 윤균상 분)이 ‘아기 장사’임을 알고부터다. 양반가의 자식이 장사라면 장군감이지만 종의 자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족은 멸하고 출신 마을마저 흉하다는 취급을 받기 일쑤다. 아모개는 이를 알고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한다. 나중엔 장사 수완을 익혀 조참봉의 재물을 불려주고 면천을 꾀한다.

일은 아모개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모개의 재산을 탐낸 조참봉과 아내 박씨(서이숙 분)는 아모개의 임신한 아내 금옥이 조산을 하고 죽도록 계략을 꾸민다. 가족과 생존을 위해 주권 없이 살아가던 아모개가 자각하고 봉기하는 순간이다. “온통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리라고 별 수 있었겠소. 인간 같지 않은 놈들 싹 다 죽여불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왜 못했을꼬.” 울분을 토한 아모개는 조참봉에게 복수를 하고 옥에 갇힌다. 주인에게 반기를 든 노비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역적’의 주인공은 아모개의 천하장사 아들 홍길동이다. 그런데 익히 알려진 홍길동과는 다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 홍길동은 없다. 대신 가족을 위해 주권을 찾아가는 강력한 아버지 아모개, 그리고 다른 이들의 주권에 대해서도 고민하며 성장하는 아모개의 아들 홍길동이 있다.

허균 소설의 홍길동이 거대한 체제에 소심하게 반기를 들었다면 ‘역적’의 홍길동은 체제를 전복시킨다. 1회 첫 장면에 등장한 연산군과 대적하는 홍길동은 불가능한 꿈의 실현이다. 연산군(김지석 분)은 대적한 홍길동에게 “멸족당한 고려 왕족의 후손이라 들었다”고 하지만 홍길동은 답한다. “난 그저 내 아버지의 아들이요. 내 아버지. 씨종 아모개의 아들.” 연산군이 “천한 몸에서 너 같은 자가 났을 리 없다”고 말하자 홍길동은 되묻는다. “그대는 나라님의 몸에서 나 어찌 그리 천한 자가 되었습니까?”

애초에 모든 생명은 벌거벗은 그 자체로 숭고한 존재다. 사유를 봉쇄하는 체제조차 자신과 가족과 동료를 위하는 인류애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천하디천한 핏줄의 홍길동이 백성의 마음을 훔친 역적이 되고, 귀하디귀한 연산군이 희대의 폭군이 된 이 색다른 영웅 서사의 서막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울화가 치미는 시대다. 상대적 박탈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다. ‘역적’은 그런 서민들에게 산소호흡기처럼 숨통을 틔워준다. 매회 치솟는 시청률이 그 증거다. 지난달 30일 첫 방송을 8.3%로 시작한 시청률은 지난 7일 방송한 4회에서 12.3%로 올라섰다.

이주영 < 방송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