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29일 사법시험 폐지를 규정한 변호사시험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하자 서울 신림동 고시촌 곳곳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시 장수생(長修生)들은 내년이 마지막 시험이라는 현실을 애써 받아들여야 했다. 고시생이 줄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지역 주민들도 깊은 한숨을 쉬긴 마찬가지였다.

독서실 앞에서 만난 9년차 고시생 유모씨(35)는 “사시 인원이 줄어들 때도 ‘내년에는 되겠지’란 생각에 수험생활을 이어왔는데 이제 시험이 없다고 하니 허탈하다”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내년 마지막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모씨(32)는 “헌재 판결에도 사시가 몇 년은 유예될지 모른다는 희망론도 있지만 이젠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가오는 시험에 집중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시 폐지는 2007년 로스쿨 도입이 결정되면서 예고돼 있던 터라 사시 준비생은 대부분 장수생이다. 2016년 사법시험 1차 합격자의 평균 나이는 33.3세였다. 5급 공채(행정고시) 최종 합격자의 평균 나이(26.6세)보다 7세가량 많다.

고시생이 대폭 줄면서 고시촌도 수년 사이 몰라보게 쇠락했다. 신림동 고시촌은 관악산에서 흘러나오는 도림천을 사이에 둔 옛 신림9동·2동(대학동·서림동) 일대를 말한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산 골프장 부지로 이전해오고 1980년대 들어 한 해 300명 선이던 사시 선발 인원이 1000명으로 늘어나면서 수험생들이 정보 교류와 주거비용 절약을 위해 모여들면서 형성됐다.

사법·행정·외무 등 ‘3대 고시’가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지던 2000년대 중반까지 고시촌은 10만명이 넘는 고시생들로 북적였다.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새로운 법조인 양성기관으로 탄생하면서 고시촌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역 상인들은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서실 서점 헌책방 등 수험 관련 업종은 직격탄을 맞았다. 대학동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2~3년 사이 폐업한 독서실만 10곳 가까이 되고 고시촌 특유의 헌책방 문화도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대로변을 지키던 한 독서실은 지난해 햄버그스테이크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한때 10여개에 달하던 고시촌 헌책방들도 최근 2년 새 절반가량이 폐업했다. 한 헌책방 주인은 “합격자가 쓰던 책이나 요약노트를 구하기 위해 중고책방이나 복사집을 수소문하던 것도 이젠 옛말이 됐다”고 했다.

독서실과 헌책방이 사라진 자리에는 커피전문점이나 식당이 들어섰다. 수험생이 떠난 빈자리는 일용직 노동자나 젊은 직장인이 차지했다. 고시촌에서 카페를 운영 중인 김모씨(37)는 “비 오는 날이면 동네 곳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 술판을 벌인다”며 “원룸도 절반 이상이 공실일 정도로 슬럼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시촌 주민 하원종 씨(62)는 “점심시간이면 서점 앞에 비치된 고시신문을 펼쳐보는 고시생들로 거리가 왁자지껄하던 시절이 있었다”며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 찼던 고시촌 특유의 문화가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