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우울증·수면장애 일반인 5∼29배
인사불이익 우려·'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상담·치료 꺼려


'1초만 빨랐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까.혹시 응급처치가 잘못된 건 아닐까.'

광주 일선 소방서에서 구급대원으로 근무하는 A 소방위는 지난 5월 27일의 기억에 시시때때로 사로잡힌다.

A 소방위는 이날 오후 건물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38살 여성을 7㎞ 가량 떨어진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여성은 추락 현장에서 힘겨운 호흡을 스스로 이어가고 있었지만,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 순간 A 소방위는 지령을 받고 출동한 뒤 흘러간 20여분의 시간이 꿈에서 겪은 환상처럼 느껴졌다.

자책과 체념, 후회가 뒤섞인 답답증은 한 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A 소방위의 가슴 한쪽을 조이며 찾아온다.

A 소방위는 "함께 출동한 동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가족, 동료 등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몇 해 전에는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신부전 환자가 새벽 시간마다 정기적으로 구급차를 불렀다"며 "솔직히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느 날 소식이 끊기면서 허망함이 밀려왔다"고 이야기했다.

사건·사고 현장에서 처참한 광경을 자주 목격하는 소방공무원들은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근무환경 때문에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4일 국민안전처 소방안전본부 전수조사에 따르면 2014년 광주지역 소방공무원은 평균 5.5회 극심한 외상사건에 노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는 광주 소방공무원은 8.1%로, 이 중 5.3%는 관리가 필요하고 2.8%는 치료받아야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우울증을 앓는 소방공무원은 12.5%로 7.3%는 관리가 필요하고 5.2%는 치료 대상인 것으로 분류됐다.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광주 소방공무원은 41.3%(관리 필요 26.4%·치료 필요 14.9%), 문제성 음주 증상을 보인 소방공무원은 36.9%(관리 필요 23.4%·치료 필요 13.5%)다.

전남지역 소방공무원도 처지는 비슷해 ▲ 수면장애 57.8%(관리 필요 36.8%·치료 필요 21%) ▲ 알코올장애 47.0%(관리 필요 29.2%·치료 필요 17.8%) ▲ PTSD 17.6%(관리 필요 11.8%·치료 필요 5.8%) ▲ 우울증 10.5%(관리 필요 12.7%·치료 필요 10.5%) 순으로 정신건강 위험군이 나타났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는 ▲ PTSD 0.6% ▲ 우울증 2.4% ▲ 수면장애 6% ▲ 알코올장애 3.2%의 전국 평균치를 보여 광주전남 소방공무원의 항목별 정신건강 위험치가 5-29배 높았다.

광주와 전남에서는 올해 1월 1일 기준으로 3천025명의 소방공무원이 시·도 소방안전본부 산하 소방서와 구조대, 안전센터 등지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있다.

구조대원 316명, 구급대원은 719명이고 나머지는 화재진압과 행정을 맡고 있다.

광주시·전남도 소방안전본부는 지역 병원 및 정신보건센터와 협약을 맺고 긴장, 예민함, 의욕저하, 우울감, 불면증, 과도한 음주, 집중력 곤란 등 정신건강이 위태로운 소방공무원의 치료를 지원하고 있지만, 참여율은 저조하다.

광주의 경우 지난해 11월 도입된 이 제도를 이용한 소방관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정신병력이 외부에 알려질까 걱정되고, 스스로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소방관은 몸도 마음도 강인해야 한다는 강박에 병원 방문을 꺼리는 것으로 풀이된다.

소방공무원이 자체적으로 섭외한 병원에서 상담이나 치료를 받고 국민안전처에 비용을 청구하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지만, 개인이 진행하는 일이라서 이용 현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광주소방본부는 거부감 없는 소방공무원 스트레스 및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함께 일하는 이들이 서로를 돌보도록 소방공무원 동료 상담사 양성을 오는 9월부터 추진할 계획이다.

소방공무원 가족을 대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PTSD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교육하는 체험형 프로그램도 함께 시행할 예정이다.

송재헌 국립나주병원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다치거나 숨진 사람을 수습하는 일 자체가 커다란 심적 고통"이라며 "약물치료가 필요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소방공무원이 직업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송 전문의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걱정하는 등 심리치료 참여율이 과거에는 저조했다"며 "최근에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내가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소방공무원 수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h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