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개혁·자매지 창간 등 성장 주도

'新聞人生 八十八年(신문인생 팔십팔년)'
8일 별세한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은 88번째 생일인 지난 1월 22일 미수(米壽) 문집 '신문인 방우영' 출판기념회장에 걸린 플래카드 문구만큼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신문과 함께한 언론인이자 경영인이었다.

1928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제 강점기에 제9대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방응모 선생의 친형 방응곤 씨의 손자이자 방일영 전 회장의 동생이다.

방응곤 씨의 차남인 아버지 방재윤 씨가 숙부 방응모 전 사장의 양자로 가면서 형과 함께 방응모 전 사장의 양손자가 됐다.

방 상임고문은 서울로 유학해 경성 경신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9년 연세대학교 상과를 졸업한 뒤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입사해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할아버지인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고 조선일보 사옥은 불에 타 폐허가 된 상태로, 고인은 형인 방일영 사장과 함께 회사 재건에 주력했다.

입 사 후 8년간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일한 고인은 1960년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았다가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해 1964년 방일영 당시 사장이 회장에 임명될 때 전무 대표이사로 취임했으며, 1970년에는 사장직에 올랐다.

사장을 맡은 이후 고인은 방일영 회장과 함께 조선일보를 개혁하고 지면을 혁신하는가 하면 '월간조선', '월간 산', '월간낚시' '스포츠조선' 등을 잇달아 창간하거나 인수했다.

1992년에는 국내 신문사 최초로 전국 동시인쇄망을 구축하고, 신문제작 전산시스템(CTS) 개발을 완료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10만부를 밑돌던 조선일보 발행 부수는 고인이 사장이 된 1970년 35만부를 기록했으며, 1979년에 100만부, 1991년에는 200만부를 넘어섰다.

고 인은 1993년 형 방일영 전 회장의 아들인 조카 방상훈 현 대표이사 사장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준 데 이어 2003년에는 조선일보 경영에 참여한 지 40년 만에 회장직까지 내놓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선일보를 국내 최대의 신문으로 성장시키는 데 주력했다.

2008년 팔순을 앞두고 출간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그는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신생(新生)의 감격과 아픔, 격동과 혼돈을 조선일보라는 창(窓)을 통해 목도하고 체험했다.

나의 신문 만들기 55년은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한 세월이었다"라고 회고했다.

한국언론연구원 이사장, 방일영문화재단 이사, 연세대재단 이사장 등도 역임했으며, 2010년부터 조선일보 상임고문을 맡아왔다.

고인은 그러나 일각에서는 조선일보 사장과 회장으로 있으면서 국내 정·관·언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06년 9월에는 방응모 선생 22주기 추모 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조선일보의 정치적 성향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로 추정되는 괴한 두 명에게 차량 뒷유리창을 벽돌로 내려 찍히는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aupf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