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대표 "옥시 사과는 '코스프레'"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이제 가해기업이 피해자에게 돈 몇 푼 더 주고 덜 주는 문제가 아니라 전국민적 재난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문제입니다.

기업이 사람 목숨 갖고 장난 못 치도록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돼야 합니다."

옥시레킷벤키저 등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싸워온 강찬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가피모) 대표는 장기간 지속된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가해기업과 피해자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적 문제가 됐다고 강조했다.

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강 대표는 먼저 "옥시의 사과는 진정성이 없는 '사과 코스프레(흉내)'"라고 지적하면서 말을 꺼냈다.

강 대표는 "옥시 측이 기자회견 사나흘 전에 전화해서 '우리가 사과 기자회견을 하려 하니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지금 검찰 수사 중이고 불매운동을 벌이려 하는 상황에서 만나거나 그 자리에 참석할 이유가 없어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5년여 동안 복지부동이던 옥시가 갑자기 '사과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검찰 수사와 집단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앞두고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의 피해조사 등급별로 보상하겠다는 옥시의 보상안에 대해서는 정부도 나서서 폐 이외 질환도 살피겠다고 밝힌 마당에 기존 등급으로 보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진행하는 TBS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 강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안방의 세월호 사건'"이라고 비유하면서 "세월호처럼 특정 지점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난 전국민 테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보다도 더 근본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 대표는 "2011년 정부가 원인 미상 폐질환의 원인은 가습기살균제라고 발표만 해놓고 피해자 대책에 대해서는 손을 뗐다"며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정부 내에 콘트롤타워가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19대 국회가 결의안을 마련하는 등 정부를 압박하자 그제야 정부는 환경보건법 시행령에 간단한 지원 근거를 마련하는 등 행동에 나섰다고 비판했다.

강 대표는 "시행령을 만드는 것을 보고 곧이어 전면구제가 진행되겠구나 하고 기대했는데 정부의 대응은 그냥 그게 끝이었다"며 "기업도 피해자를 최소한으로 배상하려 하고 정부도 (대응을) 최소로 하려고 했다"고 성토했다.

그는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가가 나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전말을 확인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까지 찾아 구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7명 피해자 중 14명이 사망해 사망률이 가장 높은 제품 '세퓨'를 인터넷을 보고 만들었다는 말에 정말 기가 막혔다"며 "대통령 직속이든 국무총리 직속이든 진상조사위를 꾸려야 하고, 정부가안 하면 국회라도 청문회를 열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야 한다"고 여러 차례 힘줘 말했다.

수년간 동분서주한 강 대표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다.

그는 아내가 간호사로 그나마 의학 지식이 있어 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강 대표 가족은 가습기살균제가 정말 괜찮은 것인지 신중하게 알아보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은 2010∼2011년이 돼서야 '덴마크 친환경 원료'를 내세운 세퓨 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감기에 걸린 딸이 얼른 낫지 않기에 빨리 낫게 하려고 가습기를 좀 더 가까이 갖다 대고 약도 이것저것 먹였다"며 "그게 악순환이 돼 딸의 폐 건강이 심각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세퓨가 건축용 등 공업용 원료를 쓴 데다 폐손상 원인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olyhexamethylene guanidine)가 옥시의 4배 이상 든 제품이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는 "간호사인 아내가 딸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알아채고 그나마 일찍 병원에 데려갔지만, 그때만 해도 병원에서는 '이 정도 상태면 열에 여섯은 결과가 좋지 않다'고 말하더라"며 "다행히 한발 먼저 간 덕분에 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딸은 정부 피해조사에서 1등급으로 나왔고, 아내는 4등급을 받았다.

강 대표 자신도 없던 비염이 생기는 등 건강에 손상을 입은 것으로 의심돼 피해자 신고를 해둔 상태다.

그는 이날 인터뷰 내내 밭은 기침을 했다.

강 대표는 "이번 사건으로 소비자가 깨어나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대한민국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생각이 들었다"며 "국민이 바라는 것은 파렴치한 돈벌이 기업에 철퇴를 가하는 것이고 기업의 윤리를 바로 세워 국민과 소비자의 안전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조만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환경단체,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영국을 방문해 영국 검찰에 옥시를 정식으로 고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comm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