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이래 대부분의 영역에서 유효하다고 인정받아 온 ‘명의신탁 약정’을 대법원이 무효로 바꿀지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명의신탁은 법조문이 아닌 판례로 효력을 인정받고 있어 대법원 판단이 바뀌면 그대로 반영된다. 실제로 바뀌면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서 한 거래가 모두 무효가 되는 등 큰 파장이 불가피하다.

“명의신탁이 탈세·탈법 부추겨”

한국경제신문이 12일 확인한 결과 대법원은 중소기업 대주주 윤모씨 등 2명이 천안시 동남구청을 상대로 낸 ‘취득세 부과 처분 취소 소송’의 상고심을 최근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윤씨는 2004년 자본금 3억원을 내 A사를 설립했다. 발행 주식의 95%를 자신과 매형 명의로 했고 5%는 지인 박모씨 명의로 차명 보유했다. 설립 두 달 뒤 발행 주식의 50%를 제3자에게 넘겼다가 2007년 자신과 매형 명의로 돌려 가족이 100% 주주가 됐다.

동남구청은 “과점주주(51% 이상·친족 포함)가 비과점주주가 됐다가 5년 내에 다시 과점주주가 되면 ‘최종적으로 늘어난 지분만큼’ 취득세를 부과한다”는 지방세법 및 시행령에 따라 윤씨와 매형에게 세금 7000여만원을 부과했다. 당초 박씨 명의였다가 이들에게 넘어간 지분 5%를 취득세 부과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윤씨 등은 “박씨는 명의신탁 약정에 따라 5%를 형식상 보유했을 뿐이고 실제 주인은 윤씨였으므로 주인이 바뀐 게 아니다”며 과세를 취소하라고 소송을 냈다.

이 사건 원심을 맡은 대전고등법원 행정1부(부장판사 신귀섭)는 명의신탁 약정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서류상 명의자인 박씨를 지분 5%의 주인으로 인정했다. 이 지분의 주인이 박씨에서 윤씨로 바뀐 게 맞기 때문에 세금 부과가 정당하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명의신탁이 유효하다는 종전 대법원 판례의 입장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현행법상 여러 규정에 따라 무효라고 판단함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4년간 검토하다가 지난달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대법원은 보통 기존 판례를 바꿀 필요가 있거나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의견 일치가 안 될 때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보낸다. 김현진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기존 판례를 반박한 하급심을 기각하지 않고 전원합의체로 가져갔다는 건 판례 변경을 검토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판례 변경 땐 ‘메가톤급 파장’

원심 재판부가 명의신탁 법리를 부정한 이유는 “제도의 효용성이 사라졌고 폐해가 크다”는 말로 요약된다. 재판부는 “명의신탁은 일제식민지시대에 일본이 등기제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종중 재산을 종중이 아닌 종중원 명의로 등록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근래에는 종중 명의로 등기가 가능해지는 등 변화가 있어 당초 입법 목적의 유용성이 거의 상실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동안 이 제도는 조세 포탈, 토지 등에 관한 각종 공법적 규제의 회피수단, 강제집행면탈 등을 위해 사용됐다”며 “주식 인수 거래의 정상화, 투명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명의자를 주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지금껏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부동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명의신탁을 인정해왔다. 신탁자(명의를 빌린 사람)가 수탁자(명의를 빌려준 사람)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재산을 사용·처분할 경우 형법상 횡령죄가 적용됐고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했다. 그러나 명의신탁 약정이 무효가 되면 형식상 주인이 실제 주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수탁자가 재산을 처분해도 형사처벌이나 손해배상 대상이 아니다. 신탁자가 “내 돈으로 사준 재산을 돌려달라”며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를 할 수 있는 정도다.

김현진 변호사는 “경영권에 대한 정보의 외부 노출과 세금 문제 때문에 기업오너가 주식을 차명 보유하는 경우가 많다”며 “원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수탁자에게 주식 처분권이 넘어가기 때문에 그 전에 지분 소유구조를 다시 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판례를 바꿀 경우 ‘명의신탁을 전제로 지금까지 맺은 법률관계를 언제까지 청산하라’고 유예기간을 둘 수도 있다”며 “사회의 투명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명의신탁

형식적으로는 수탁자(명의를 빌려준 사람)의 재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신탁자(명의를 빌린 사람)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법률관계. 부동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인정받고 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