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시도하려는데 사령부를 갑자기 해체하면 어떻게 되겠어요.”(2011년 김준규 전 검찰총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론이 불거질 때마다 역대 검찰총장들은 이렇게 반발했다. 대검 중수부는 ‘거악 척결의 중심’이라는 검찰의 자부심에서 나온 반격이었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의 발언 후 1년여가 지난 지금, 결국 불발되긴 했지만 대검 중수부는 검찰수뇌부에 의해 ‘자체 개혁의 제물’로 거론되는 상황을 맞았다. 대검 중수부는 1981년 설립 후 30여년 동안 사회적 이목을 끄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수사했다. 그와 함께 ‘편파·기획수사’ ‘정치검찰’ 등의 비판도 거셌다. 대검 중수부장 자리를 거친 30명 역시 격려 또는 비판을 받았다.

◆‘야전사령관’ 30명은 누구

‘특수수사의 달인’임을 자타가 인정해야 오를 수 있는 대검 중수부장 자리. 검찰 인사에서는 ‘빅4’(서울중앙지검장, 대검 중수부장, 대검 공안부장, 법무부 검찰국장)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특수통’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검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자리인 만큼 대검 중수부장 출신들은 대부분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본지 분석 결과 역대 대검 중수부장 30명 중 검찰 조직의 수장인 총장 자리에 오른 경우는 김종빈(22대), 이명재(17대), 박순용(16대), 김태정(11대), 박종철(6대), 김두희(2대), 이종남(1대) 등 7명이었다.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사례로는 이귀남(26대), 김태정, 정성진(10대), 김두희, 이종남 등 5명이다. 검사장 다음 승진 코스로 꼽히는 고검장으로 올라선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수상 고검장급 인사 대상이 아닌 최재경 현 부장을 비롯해 이인규(28대), 유창종(21대), 최병국(14대), 안강민(13대), 정성진(10대), 강원일(5대) 등 7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고검장을 달았다.

출신학교별로는 서울대가 22명, 고려대가 6명으로 대다수였다. 부산대를 졸업한 고 김경회, 충남대를 나온 김홍일 등 2명도 고검장으로 승진했다.

중수부장을 지낸 다음 정계로 진출한 경우도 있다. 역대 중수부장 중 유일하게 대법관으로 퇴임한 안대희(23대)는 현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고, 최병국(14대)은 한나라당 17~18대 국회의원, 이원성(12대)은 새천년민주당 16대 국회의원, 신건(8대)은 국가정보원 차장과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하고 무소속으로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관운도 좋았다. 신광옥(19대), 이종찬(18대)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송종의(9대)는 법제처장을 지냈다. 한영석(3대)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법제처장을 역임했다. 정성진은 국민대 총장과 국가청렴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대검 중수부의 주요 수사는

1981년 출범 초기 대검 중수부의 작품은 ‘큰손’으로 불린 장영자 이철희 부부 사기사건이었다. 장씨 부부의 6400억원대 어음사기 사건은 초대형 경제범죄로 큰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과 일가도 대검 중수부를 피해가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5공화국 비리 수사를 지휘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족과 실세를 구속했고, 1995년에는 비자금 은닉 혐의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기소했다.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구속됐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고 김 전 대통령의 아들 홍업씨와 홍걸씨가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대검 중수부 수사의 높은 무죄율과 ‘죽은 권력만 수사, 표적수사하는 정치검찰’이란 비판은 정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중수부 폐지론의 주된 원인이다.

◆‘박연차 게이트’로 거세진 폐지론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로 이어지면서 대검 중수부는 거센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이인규 28대 부장은 2009년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과 함께 검찰을 떠났다.

중수부는 29대 김홍일 부장의 지휘 아래 2010년 C&그룹 수사가 진행돼 오랜 개점휴업을 접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재경 현 부장 때는 총장과 그의 ‘직할 부대’인 대검 중수부 수장 사이의 갈등이 처음으로 외부에 노출됐고, 총장이 대검 중수부 폐지 공식 발표를 결심했던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