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글로 쓰지 않고 금융상품에 담는다
#1. 30억원대 자산가 박모씨(70)는 재산을 외손자·외손녀에게 물려주고 싶다. 하지만 딸 부부가 조만간 이혼할 것으로 예상돼 사위가 친권을 가지면 외손들에게 물려준 재산을 사위가 관리하며 쓰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다. 박씨는 은행 프라이빗뱅킹(PB) 센터와 상의한 끝에 자신이 사망 시 외손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되, 이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은행 신탁으로 돈을 관리한다는 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2. 100억원대 자산가 이모씨(72)는 큰아들 대신 작은아들에게 더 많이 상속을 해 주고 싶지만 작은아들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이 걱정이다. 그는 만약 작은아들이 사망할 경우 남은 재산을 두고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자식들이 법정다툼을 벌일까 우려하고 있다. 이씨는 유언의 효력이 있는 신탁계약을 통해 작은아들에게 재산 70%를 상속하되, 그가 사망하면 작은아들의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그 재산이 넘어가도록 설정했다.

유언, 글로 쓰지 않고 금융상품에 담는다
상속 문제로 고민이 많은 자산가들 사이에서 미국식 ‘유언대용신탁’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금융회사에 자산을 신탁하는 계약으로 유언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다. 살아있을 때 돈을 맡기기 때문에 생전신탁으로도 불린다.

국내 금융사들 중에선 하나은행 삼성생명 미래에셋생명 등이 운영하고 있다.

신탁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유언장에 비해 유연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상속계획을 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유언장은 한 번 상속이 이뤄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상속받은 사람이 사망하면 그 돈은 누가 갖는다거나, 갖지 못한다는 식으로 쓸 수 없다. 반면 유언대용신탁을 할 경우 ‘시나리오’를 짤 수 있다. A가 사망 시 B에게, B가 사망 시 C에게 준다는 식으로 자산 대물림 설계가 가능하다. 금융회사가 존재하는 한 신탁이 유효하고, 금융사 파산 시에도 신탁자산은 손해 없이 본인이나 상속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20~30년 후의 상황까지 설정해 계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금융사는 정기예금 채권 증권 등 신탁받은 자산을 고객의 요구에 따라 운용하게 된다. 부동산은 금융사 명의로 바뀌지만, 신탁계약이 해지되거나 상속이 이뤄지면 명의가 본인이나 상속인에게 돌아간다.

현재 이 분야에서 가장 선도적인 상품은 하나은행의 ‘리빙트러스트’다. 2010년 4월 상품이 처음 출시됐고, 작년부터 입소문을 타고 부유층 자산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대신 고객은 수수료를 내야 한다. 리빙트러스트의 경우 상담·설계비용(기본보수), 관리비용(연간보수), 신탁자 사망 후 명의이전비용(집행비용) 등 세 가지 수수료를 받는다. 기본보수는 총 가입금액의 0.2% 이상, 관리비용은 해마다 가입금액의 0.1% 이상이나 실제로는 상담과정에서 탄력 적용된다. 배정식 하나은행 신탁부 종합재산신탁팀장은 “금융자산 5억원, 부동산자산 10억원 이상 고객이 주 타깃”이라고 말했다.

삼성생명도 하나은행과 비슷한 ‘노블레스 생전증여신탁’ 상품을 판매 중이다. 최저가입금액은 1억원 이상, 투자기간은 3~30년이다.

유언대용신탁 관련 시장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달 26일부터 개정 신탁법이 발효되면 유언대용신탁의 법적 근거가 좀 더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법무부의 유권해석에 의해 상품이 운영됐다. 금융사들이 개정 신탁법을 근거로 새로운 상품을 내놓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신탁법 개정에 따라 금융투자협회와 은행연합회가 공동으로 신상품을 개발 중”이라며 “앞으로 금융사마다 다양한 유언대용신탁 상품이 출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