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두려운 교사들 "차라리 없앴으면 좋겠어요"
경기도 한 공립중학교 국어교사인 양모씨(29). 정식교사가 된 지 올해로 2년차인 그는 스승의 날인 15일 ‘건강상의 이유’로 휴가를 냈다. 스승의 날 주인공이어야 할 양씨가 휴가를 신청한 속내는 따로 있다.

양씨는 작년 스승의 날에 제자들이 용돈을 모아 사온 선물을 ‘덥석’ 받은 뒤 반년 가까이 ‘선물 밝히는 교사’라는 루머에 시달렸다. 한때 원형탈모증이 생기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양씨는 “어린 학생들이 보내온 작은 정성마저도 오해받는 현실이 너무 살벌했다”며 “차라리 스승의 날을 없앴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스승의 날에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어야 할 일선 교사들이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다. 최근 학교폭력의 만연으로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고, 끊이지 않는 교육계 비리로 교사에 대한 불신이 쌓여만 가는 현실에 지친 교사들이 늘고 있는 것. 이들은 언제부턴가 스승의 날 감시의 대상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오해와 불신을 낳는 스승의 날이 두렵기까지 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31회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둔 13일. 서울 광진구의 한 중학교 교무실에서 만난 여교사는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촌지’ 관행 때문에 이맘때면 스스로 죄인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교직생활 15년차인 강모 교사(42)는 “1년 내내 별문제없이 지내다가도 봄소풍과 스승의 날 등 행사가 많은 5월이면 교무실 분위기가 냉랭해진다”고 안타까워했다.

전국 일선학교가 스승의 날을 앞두고 각 가정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아무리 사소한 선물이라도 보내지 말 것’을 완곡하게 당부하는 가정통신문과 ‘찬조금 사절’ 통신문을 보내는 것도 촌지 비리를 사전에 막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특히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건 스승의 날 교육청에서 나오는 ‘암행감사’. 교육청은 끊이지 않는 촌지관행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몇년 전부터 스승의 날에 일반인으로 가장한 사복감사반을 보내 전국 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다.

고양시의 한 중학교 교사는 “스승의 날 출근길에 낯선 감시인을 만나면 불법사찰을 당하는 느낌”이라고 불쾌해했다.

교직생활 4년차인 경기도 한 초등학교의 정모 교사는 “재작년에 사복을 입고 정문을 지키던 교육청 감사가 3만원이 넘는 호두과자를 담은 쇼핑백을 들고 온 학부모를 뒤쫓아와 현장을 목격하게 됐고 결국 해당 교사는 징계받았다”고 털어놨다.

이러다 보니 사제 간 정은 사라진 지 오래고, 유독 스승의 날 이후 학부모와의 관계도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서울 강서구 한 중학교의 정모 교사(40)는 “작년에 화장품을 돌려보냈더니 섭섭하고 민망했던지 그 이후로 학부모가 전화 한 통 없었다”며 “스승의 날엔 혹시나 선물이 들어 올까봐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서울 목동의 한 초등학교 국어교사인 이모씨(30)는 “스승의 날 학생들과 시선맞추는 것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촌지에 대한 학교 측의 부담은 학교행정마저 파행으로 만들고 있다. 서울 동작구의 한 초등학교는 최근 학부모들과의 상담 기간을 3월로 바꿨다. 그동안은 학년이 바뀐 학생들의 교우관계와 성격 등을 파악할 시간을 벌기 위해 5월이나 6월 학부모와 면담을 가져왔다. 하지만 1 대 1 면담이 가져올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일정을 학기 초로 교체한 것.

이 학교 2학년 담임 안모 교사(37)는 “모든 학교들이 아예 문제가 커질 일을 만들지 않다보니 결국 학생들의 성향도 파악하지 못한 채 학부모와 상담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꼴”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익/이지훈/김우섭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