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두려운 교사들 "차라리 없앴으면 좋겠어요"
학부모들 쇼핑백 들고 오면 사복 감사반 뒤쫓아와 감시
몇천원짜리 선물도 '무서워'…학부모와 1년 동안 서먹서먹
일대일 면담도 학기초로 교체
양씨는 작년 스승의 날에 제자들이 용돈을 모아 사온 선물을 ‘덥석’ 받은 뒤 반년 가까이 ‘선물 밝히는 교사’라는 루머에 시달렸다. 한때 원형탈모증이 생기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양씨는 “어린 학생들이 보내온 작은 정성마저도 오해받는 현실이 너무 살벌했다”며 “차라리 스승의 날을 없앴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스승의 날에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어야 할 일선 교사들이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다. 최근 학교폭력의 만연으로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고, 끊이지 않는 교육계 비리로 교사에 대한 불신이 쌓여만 가는 현실에 지친 교사들이 늘고 있는 것. 이들은 언제부턴가 스승의 날 감시의 대상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오해와 불신을 낳는 스승의 날이 두렵기까지 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31회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둔 13일. 서울 광진구의 한 중학교 교무실에서 만난 여교사는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촌지’ 관행 때문에 이맘때면 스스로 죄인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교직생활 15년차인 강모 교사(42)는 “1년 내내 별문제없이 지내다가도 봄소풍과 스승의 날 등 행사가 많은 5월이면 교무실 분위기가 냉랭해진다”고 안타까워했다.
전국 일선학교가 스승의 날을 앞두고 각 가정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아무리 사소한 선물이라도 보내지 말 것’을 완곡하게 당부하는 가정통신문과 ‘찬조금 사절’ 통신문을 보내는 것도 촌지 비리를 사전에 막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특히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건 스승의 날 교육청에서 나오는 ‘암행감사’. 교육청은 끊이지 않는 촌지관행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몇년 전부터 스승의 날에 일반인으로 가장한 사복감사반을 보내 전국 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다.
고양시의 한 중학교 교사는 “스승의 날 출근길에 낯선 감시인을 만나면 불법사찰을 당하는 느낌”이라고 불쾌해했다.
교직생활 4년차인 경기도 한 초등학교의 정모 교사는 “재작년에 사복을 입고 정문을 지키던 교육청 감사가 3만원이 넘는 호두과자를 담은 쇼핑백을 들고 온 학부모를 뒤쫓아와 현장을 목격하게 됐고 결국 해당 교사는 징계받았다”고 털어놨다.
이러다 보니 사제 간 정은 사라진 지 오래고, 유독 스승의 날 이후 학부모와의 관계도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서울 강서구 한 중학교의 정모 교사(40)는 “작년에 화장품을 돌려보냈더니 섭섭하고 민망했던지 그 이후로 학부모가 전화 한 통 없었다”며 “스승의 날엔 혹시나 선물이 들어 올까봐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서울 목동의 한 초등학교 국어교사인 이모씨(30)는 “스승의 날 학생들과 시선맞추는 것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촌지에 대한 학교 측의 부담은 학교행정마저 파행으로 만들고 있다. 서울 동작구의 한 초등학교는 최근 학부모들과의 상담 기간을 3월로 바꿨다. 그동안은 학년이 바뀐 학생들의 교우관계와 성격 등을 파악할 시간을 벌기 위해 5월이나 6월 학부모와 면담을 가져왔다. 하지만 1 대 1 면담이 가져올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일정을 학기 초로 교체한 것.
이 학교 2학년 담임 안모 교사(37)는 “모든 학교들이 아예 문제가 커질 일을 만들지 않다보니 결국 학생들의 성향도 파악하지 못한 채 학부모와 상담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꼴”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익/이지훈/김우섭 기자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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