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홍수 속에서 '탈무드'의 지혜를 반추해 본다. "남의 자비에 의존하느니 차라리 가난을 택하라." "돈과 물건도 거저 주는 것보다 빌려주는 것이 낫다. 그냥 얻으면 얻는 쪽이 준 쪽보다 '밑'에 있게 되지만 빌리고 빌려주면 서로 '대등'해질 수 있다. " 탈무드는 자비를 폄훼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존엄과 자조(自助)를 강조한다.

열대성 저기압이 바다의 습기를 빨아들여 세력을 키우면 태풍으로 변한다. 보편적 복지도 그 시작은 좌파교육감 후보가 주창한 '무상급식'이었다. 무상급식은 무상의료,무상보육,반값 등록금으로 외연을 넓힘으로써 '3+1'의 구도를 가진 'C급 태풍'으로 자랐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라는 'A급 태풍'으로 모양을 다듬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로 상징되는 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켜주는 것이다. 좌파진영의 구상은 치밀하다. 복지를 아젠다로 복지동맹을 구축해 2012년 대선에서 집권한다는 것이다.

열대성 저기압이 태풍으로 커진 것은 이명박 정부가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MB정부 출범 초기의 이념과 가치지향은 사라졌다. 친시장,국민성공,일류기업,선진국 진입은 종적을 감췄고 친서민,중도실용,공정사회가 그 자리를 메웠다. '왼쪽으로의 클릭'으로 한나라당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민주당의 아젠다에 포획됐다. 한나라당의 '소득하위 70%'를 대상으로 한 '선별적' 복지는 '보편적 복지'의 디딤돌로 이용됐다.

여권 유력 대선 후보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는 의미심장하다. 복지가 결코 진영 논리일 수 없으며 성장과 복지도 이분법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소외된 경제적 약자를 확실히 보듬는 '원칙이 선 자본주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큰 만큼 반론도 가능하다. 복지수요를 한껏 수용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복지수요를 조절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복지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원칙이 선 자본주의'일 수 있다.

보편적 복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는 캐머런 총리의 복지개혁으로 종언을 고했다.

영국의 복지개혁은 직접적으로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미증유의 재정적자에 기인한다. 하지만 재정적자는 촉발요인일 뿐,그 근저에는 복지제도의 실패가 자리 잡고 있다. 한번 도입된 복지 프로그램은 절대 축소할 수 없다. 대처 전 총리조차 무상 의료의 대명사인 '국민보건서비스(NHS)'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남유럽 국가도 국력에 비해 높은 수준의 복지혜택을 누리다가 국가존망 위기를 맞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가 세계 14위이지만,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로 50위권에 머물고 있다. 2만달러로 4만달러의 복지를 누릴 수는 없다. 저출산,고령화로 현행 복지제도를 유지한다고 가정해도 복지수요는 팽창하게 돼 있다. 뿐만 아니라 통일에도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데 정책초점을 맞춰야 할 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상복지'가 아닌 '복지확충'이며,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복지재원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산(無産)국가'이다. 국가의 능력이 무한대일 수 없다. 따라서 복지에도 원칙이 필요하다. '기준과 자격을 정해 필요한 최소의 곳에 충분한 지원'을 해 실제 자립을 돕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타락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무상복지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증세 대신 재정혁신을 통해 복지재원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은 사탕발림이다. 섣부른 보편적 복지는 미래세대가 가져가야 할 경제자원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라는 '치명적 유혹'의 끝은 자명하다. 무상복지라는 '괴물'을 굶겨야 한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