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유통사업부에 근무하는 황선호 과장(36).1분 1초가 금쪽같은 아침 출근시간마다 옷장 앞에서 머뭇거리는 때가 많다. 작년 말 회사 방침이 '자율 복장'으로 바뀐 뒤부터 생긴 버릇이다. 세련된 캐주얼 복장을 입고 나타나는 후배들의 패션감각이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캐주얼=청바지'란 생각을 가진 그에게 청바지 착용을 금지한 회사의 드레스코드는 얄궂기만 하다. 입을 옷이 없어 기존 양복에 넥타이만 매지 않고 출근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옷 좀 사요"라는 후배들의 핀잔이 돌아온다.

삼성 LG SK CJ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율 복장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패션과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창의적으로 일하기 위해선 복장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취지의 자율 복장 제도가 일부 직장인들에겐 부담이 되고 있는 것.자율 복장 제도 도입에 따른 후유증 이외에도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외모 가꾸기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김 과장 · 이 대리도 늘고 있다.

◆"우리 그냥 양복 입게 해주세요"

자율 복장 정책을 도입한 기업들이 제시하는 '비즈니스 캐주얼'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민호 과장(38)이 내린 결론은 "예전처럼 양복을 입고 출근하자"였다. 하지만 완전히 옛날과 똑같은 정장 차림으로 출근을 하는 것도 회사의 새로운 방침에 '항명'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고 판단,와이셔츠 대신 캐주얼 남방을 입는 선에서 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이 과장은 "한 벌에 20만원이 넘는 캐주얼 콤비를 구입하는 것이 부담이 돼 기존 양복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런지 종전처럼 정장에다 넥타이만 바꿔 매던 시절이 더 편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과장과 같은 직장인들을 위해 일부 기업들은 인사팀 등에서 특별 패션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처음 자율복장제를 실시할 때는 면바지에 검은색 정장구두를 신고 오거나 폴로티에 양복바지를 입고 오는 등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 많았다"며 "사보나 게시판을 통해 비즈니스 캐주얼 코디법을 써서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사내 방송을 통해 감색 · 회색 등 기본 재킷을 갖출 것과 바지는 재킷과 다른 명도의 색깔을 택할 것 등과 같은 권장 패션 스타일을 직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발가락 양말은 제발 NO'

여성 직원들이 꼽는 최악의 남성 패션은 뭘까. 발가락 양말,양말에 샌들 차림,겨드랑이가 축축하게 젖은 푸른색 와이셔츠 등 '아저씨스러운' 모든 것은 당연히 지탄의 대상이다. 지저분한 것은 당연히 '에러'다. 서울의 한 대형 은행에 근무하는 고민정씨(31 · 여)는 "김칫국물이 튄 넥타이라든가 뒷목 부분이 시커멓게 된 와이셔츠 같은 것이 보기 싫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에 넥타이가 더럽혀진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지만 다음 날도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것을 보면 무신경함에 짜증이 날 정도"라고 전했다.

반대로 남자들이 꼽는 최악의 여성 패션은 성(性)적인 이미지와 관련이 깊다. 지나치게 짧은 미니스커트,가슴이 보일락 말락하는 블라우스,속옷이 훤히 비치는 옷 등이다. 광고기획 회사에 다니는 김명훈 대리(30)는 "여성들은 패션의 자유라고 주장하지만 보는 남성들은 공연히 자신이 성희롱으로 엮일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꼬집었다.

◆여성 직장인에겐 패션 자체가 스트레스

직장 여성들에게 패션과 외모는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다. 매일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것도 어렵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비교된다'는 점이다.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강수희 대리(31 · 여)는 최근 같은 부서에 배치된 동기 여직원 때문에 매일 출근 준비시간이 30분은 더 늘었다. 동기는 여우 같은 타입.얼굴도 예쁘고 명품을 즐기며 매일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화려한 차림을 고수한다. 그가 인사할 때면 부장은 "아유,우리 봄처녀 오셨네~"라며 입이 헤 벌어진다. 강 대리와 살갑게 지냈던 남직원들도 요즘은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강 대리는 "월급을 탈탈 털면 동기처럼 하고 다니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그건 바보 같은 일"이라며 "대신 아침에 더 꼼꼼히 화장하고 옷도 가급적 세련되게 챙겨입으려 한다"고 전했다.

◆명품 하나 없으면 조금 불행한 겁니다

스타일을 중시하는 직장인들이라면 명품의 유혹을 쉽사리 떨쳐내기 힘들다. 여성 직장인들에게 명품 핸드백 하나 정도는 필수 아이템이 된 지 오래다.

국내 한 특급 호텔 마케팅팀에는 명품 핸드백과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마케팅팀은 팀원 8명 중 7명이 여자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스타일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1년 전 이 부서에 신입 여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 여직원이 팀에 배치된 지 한 달가량이 지났을 무렵 바로 위 선배에게 사석에서 이렇게 물어왔다고 한다. "저,선배님 그런데 저에게는 언제 L사의 핸드백을 지급해 주나요?" 신입사원의 느닷없는 질문에 선배는 순간 당황했다. 모든 선배들이 똑같은 브랜드의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걸 본 신입 여직원이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나눠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웃지못할 에피소드다.

◆"살들아,내 살들아…"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몸매관리에 나서는 직장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조경훈 대리(32)는 이달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1년 가까이 움직이는 것과는 담 쌓고 살았지만 노출의 계절인 여름이 되면서 뱃살을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은 에너지바 2개로 때우고,저녁약속은 가급적 잡지 않는다. 회식을 해야 하는 날에는 고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조 대리는 "배가 나오면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일단 아저씨 취급을 받고 회사에서는 둔한 사람,자기 관리에 소홀한 사람으로 찍혀 뱃살을 빼는 게 지상 최대 과제가 됐다"고 밝혔다.

외국계 교육기업에 다니는 손인희 과장(33 · 여)은 다이어트를 위해 해 보지 않은 일이 없다. 사과나 포도처럼 한 가지 음식만 먹는 원푸드 다이어트는 물론이고 체중 관리를 위해 석 달에 200만원짜리 헬스 회원권도 덜컥 끊는다. 그렇다고 체중관리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손 과장은 "몸매를 바꿔보려고 쓰는 돈이 한 달에 50만~60만원은 되는데 별로 변화가 없다"며 "전신 성형은 무서워서 못하지만,돈으로 몸매를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이정호/김동윤/정인설/이상은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