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과 한국경제신문이 1일 개최한 월례 토론회에서는 노사관계 선진화의 핵심 과제인 단위 사업장 복수 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금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두 가지 이슈는 1997년 제정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들어 있지만 재계와 노동계가 법 시행에 반대하면서 세 차례나 시행 시기가 연기됐다. 시행 유예 기한이 연말까지 4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재계와 노동계가 입장차를 보이고 있고 정부의 태도도 미온적이어서 시행이 다시 유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조 책임성 위해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박세일 교수는 정부가 재계와 노동계의 의견을 더 듣겠다는 이유로 복수 노조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조항 관련 후속 입법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안일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노사 간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책을 실행하지 않으면 정부는 왜 있고 국회는 왜 있는 것이냐"고 말했다.

그는 "노사 양측이 의견 접근을 이룰 수는 있어도 완전한 합의에 이르기는 힘들다"며 "정부가 이해 당사자 사이에서 최종 결론을 내릴 생각은 않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탓에 10년이 넘도록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관련 법을 만들 때도 2년 동안 각계의 연구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며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연수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도 "재계와 노동계의 합의를 기다리다가는 10년,20년이 지나도 복수 노조와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가 시행될 수 없을 것"이라며 정부가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정 위원장은 복수 노조 허용이 노조 활동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일 노조 체제인 지금도 지하철노조를 비롯한 일부 노조는 내부의 정파 싸움이 극심해 사실상 복수 노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며 "차라리 복수 노조를 허용해 조합원이 노조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여러 노조가 합법적으로 경쟁하는 상황이 되면 이념 투쟁에 몰두하는 노조는 조합원들한테 외면받아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라는 얘기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회삿돈이 아닌 노조 조합비로 전임자의 임금을 주면 조합원 스스로가 노조 활동에 대해 감시하고 견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현 시점에서 복수 노조보다는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가 더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며 두 가지를 분리해 시행하는 것도 검토해 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논의하다 보니 이해 당사자 간 의견 대립이 더 심해진다는 이유에서다.

박길상 호서대 교수(전 노동부 차관)는 "선진국에서는 복수 노조를 허용하고 노조 전임자에게 사측이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불필요한 논쟁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기준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윤배 서울인베스트 대표는 "지금도 상당수 노조가 법에서 허용하는 범위를 넘는 수의 전임자를 두고 회사에서 임금을 받고 있다"며 "법 이전에 중요한 것은 노사관계를 원칙대로 풀려는 노사 당사자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개별 기업마다 입장 차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재계와 노동계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재계 내에서도 개별 기업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매년 노조의 파업으로 몸살을 앓는 현대 · 기아자동차 측에서는 법 시행을 통해 강성 노조의 힘을 누그러뜨릴 필요성을 주장한 반면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LG전자 측에서는 법 시행 이후 나타날 혼란에 대해 우려했다.

정병문 현대 · 기아차 상무는 "노사관계 선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수 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가 정답"이라고 말했다. 정 상무는 "노동계가 복수 노조 시행 이후 교섭 창구 단일화와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를 노사 간 자율에 맡기자고 하는 것은 사측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노동계가 더 이상 사측에 대해 약자가 아니라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반면 황상인 LG전자 상무는 "복수 노조 허용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기업은 기업대로,노조는 노조대로 새 법률 시행에 따른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세계 각지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어 현 상황에서 기능직 파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무직이 파업에 돌입할 경우 차질이 생길 수 있다"며 복수 노조 허용시 사무 · 관리직이나 연구 · 개발직을 중심으로 한 노조가 결성돼 회사 경영에 해를 끼칠 가능성을 제기했다.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가 전면 시행될 경우 대기업 노조보다는 중소기업 노조가 위축될 가능성도 있다. 김용목 노루표페인트 노조위원장은 "중소기업 노조는 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기에는 조직적 ·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다"며 "노조 활동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법을 시행하되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부터 시행한다는 식으로 부칙을 만들면 중소기업 노조의 활동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