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명예퇴직한 뒤 집에서 아내가 주는 눈칫밥만 먹고 사는 백수,아들의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투잡'을 뛰며 고달프게 살아가는 중년 남자,아내와 아들을 해외로 보내고 매일 저녁을 라면으로 때우며 혼자 살고 있는 기러기아빠….인생의 낙이랄 게 없는 세 남자가 의기투합해 록밴드를 만들고 홍대앞 록카페 무대에서 콘서트까지 갖는다. 지난해 가을 개봉했던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다.

서울 삼성동에 본점을 두고 있는 현대스위스저축은행에서는 이런 얘기가 영화가 아닌 실제의 일이다. 임직원들로 기타는 물론 베이스와 건반,보컬까지 제대로 갖춘 그럴싸한 그룹사운드가 꾸려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룹사운드의 정점에는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드럼 치는 회장님' 김광진 회장(54)이다. 김 회장은 백수도 아니고 밤낮 없이 '투잡'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드럼을 치기 시작한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과 비슷하다. 보다 즐거운 인생을 살고 싶어서란다.

"나이 오십이 되니까 이제껏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하나씩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드럼도 그중 하나였고요. 과거에 '송골매' 같은 밴드에서 드럼 치는 사람들을 보면 카리스마도 있고 굉장히 멋있잖아요. "

김 회장이 드럼 스틱을 처음 잡은 것은 그가 꼭 오십살 되던 2004년이었다. 전문 연주자를 찾아 개인 교습을 받았고 아무리 일이 바빠도 2~3일에 한 번은 일찍 퇴근해 연습을 했다. 청담동 제2본점 지하에 있는 사내 밴드 동호회 연습실에서 새벽 2~3시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을 한 날도 많았다.

'실황공연'을 부탁했더니 "초보가 뭘" 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한 쪽에 준비해 둔 드럼 앞에 가서 스틱을 쥐고 자리를 잡았다. 스스로 초보라고는 했지만 매년 송년회 때마다 밴드 동호회와 함께 멋들어진 연주를 선보일 정도로 간단치 않은 실력이다.

"처음 송년회에서 공연할 때는 아무도 못 알아보게 선글라스에 두건을 쓰고 옷도 진짜 가수처럼 입고 나갔어요. 연주를 마치고 무대 앞으로 나오면서 선글라스를 벗었더니 난리가 났죠.직원들이 전부 뒤로 나자빠지고 특히 여직원들은 '회장님 멋있다'면서 사진 찍자고 달려들고…."

적지 않은 나이에 젊은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드럼을 배운다는 것이 쑥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그는 단지 "생각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이 닫혀 있으면 안 된다는 설명이다.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박자를 맞춰가며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가는 드럼의 역할이 최고경영자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라고 했다. 오히려 그는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걸 배우고 작게나마 성취를 해내는 모습이 직원들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결심을 하면 실행에 옮겨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최고경영자가 몸소 보여주는 겁니다. 특히 드럼 같은 음악이나 체육활동은 직원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되죠."

김 회장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자산 규모 800억원에 불과했던 현대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해 10년도 안 돼 자산 2조7000억원의 대형 저축은행으로 키워냈다. 이 과정에서 국내 금융권 최초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개발하고 인터넷 기반 신용대출 상품인 '알프스론'을 출시하는 등 남다른 감각과 수완을 발휘했다.

이처럼 은행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그는 '감성 경영'을 꼽았다. 그는 연말 송년회에서 드럼 실력을 보여주는 것 외에도 한 달에 한 번씩 직원들과 함께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사내 동호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직원 간 '스킨십'을 중시한다.

직선 일색이던 영업점 창구를 곡선 형태로 만들고 기존 은행 지점에 비해 조명을 밝게 하는 등 실내 디자인에 변화를 준 것도 김 회장이 처음 시도한 이후 다른 저축은행으로 퍼져 나갔다.

"저는 IQ(지능지수)보다는 EQ(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것도 그렇고,부하 직원 중에서도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보다는 저처럼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려는 열정이 있고 성실한 사람이 더 마음에 듭니다. "

글=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