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생각할수 없는 것까지 상상하라

아버지와 딸이 있었다.

명문 케임브리지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버지는 위대한 문학가를 꿈꿨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글들은 재미없는 분석 일색의 비평뿐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이류 지성인이라는 패배 의식에 시달렸고 실제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딸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독창적인 전개방식과 빼어난 문장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가 됐다.

그녀가 1951년에 쓴 '댈러웨이 부인'은 2003년 니콜 키드만 주연의 화제작 '디 아워스'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버지니아 울프다.

엘리트였던 아버지가 그저 그런 작가로 생을 마감한 것과 달리 내세울 학벌조차 없던 딸이 후세에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상상력의 차이 때문이다.

울프는 언젠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두뇌 사용만 강조하고 음악 미술 연극 여행 같은 감성 활동을 도외시한 당시 케임브리지식 교육의 희생자였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편협한 교육방식이 지적 편중과 창조력 결핍으로 이어졌다는 얘기였다.

반면 울프는 어린 시절부터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의 고전 작품을 접하고 박물관의 기계 전시실이나 곤충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폈다.

덕분에 그녀는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완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고 사물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예민한 감수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데는 지식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말한 사람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어린 시절 낙제생이었던 그는 풀밭을 거닐면서 '빛의 속도로 달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하는 엉뚱한 상상에 빠졌고 20세기 과학혁명을 이끈 상대성이론은 스스로 내놓은 해답이었다.

또 아이작 뉴턴이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지구와 달,행성과 행성이 서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과감한 '상상'을 하지 못했더라면 고전역학의 결정판인 만유인력의 법칙은 영영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단 문학이나 과학의 영역만이 아니다.

기업경영이나 국가전략에서도 상상력이 위력을 발휘한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생각했다는 '유조선 공법'이 대표적이다.

그는 1984년 서산간척지의 막바지 물막이 공사 때 물살이 워낙 빨라 고전하는 것을 보고 폐유조선을 바다에 가라앉혀 물살을 늦추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물살이 빠르면 물살을 늦추면 된다는 단순한 듯한 이 생각은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공학박사들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현대건설은 이 공법 덕분에 간척지 공사 기간을 3년가량 앞당기고 막대한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사막의 어촌에 불과하던 두바이가 석유와 금융거래의 허브,인공섬과 세계 최고층 빌딩이 들어선 관광허브로 탈바꿈한 것도 셰이크 모하메드 왕의 상상력이 아니라면 어림없었을 이야기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언젠가 "CEO(최고경영자)는 종합 예술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과거처럼 안정적인 경영환경에서는 과학자처럼 분석적이고 숫자 감각이 뛰어난 CEO가 높은 성과를 냈지만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요즘에는 예술가처럼 상상력과 직관,감성이 뛰어난 CEO가 두각을 나타낸다는 지적이다.

이 회장이 최근 "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할 때의 '천재'도 단순히 한 분야에 특출난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라 전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예술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을 주창하는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에코과학부)은 "20세기에는 쪼개고 쪼개는 분과학문이 유행하다보니 지식이 파편화되고 포괄적 이해와 창조성을 기르기는 힘들어졌다"며 "21세기에는 학문과 학문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베스트셀러 '생각의 탄생'의 공동저자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미셸 루트번스타인도 우리 시대의 천재는 전문가(specialist)가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제각각 떨어진 지식을 통합하는 전인(generalist)이라고 갈파했다.

그가 대표적인 천재로 꼽은 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인이다.

편협하고 틀에 박힌 지식인보다 상상력과 직관,감성과 소통 능력을 중시하는 흐름은 최근 들어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도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의 일이다.

면접관이 한 지원자에게 물었다.

"전공이 생물학인데….당신이 우리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죠?" 지원자가 답했다.

"제 석사논문 주제가 '강화도 갯벌에 사는 수컷 농게가 암컷 농게를 꼬시는 법'입니다.

다른 지원자들을 보니 대부분 전기·전자 전공이던데요.

고객 꼬시는 아이디어는 그 사람들 머리가 아니라 제 머리에서 나오지 않을까요?" 면접관의 눈이 반짝였고 그는 치열한 입사 경쟁을 뚫었다.

한국의 교육은 이 같은 변화를 따라올 준비가 돼 있을까.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빨리 문제를 푸는지를 테스트하고 자신의 생각을 써야 하는 논술마저도 입시학원이 짜준 모범답안이 범람하는 우리 교육에서 '게으른 천재'가 나올 수 있을까.

우리 교실에선 지금 어쩌면 또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